020. 점심 먹기 전에 들어올게

by joyfulmito

둘째가 개학하는 날이다. 둘째가 학교에서 점심을 먹고 올 테니 평소에 아들이 먹지 않는 마라탕을 시켜 먹기로 했다. 점심 준비할 걱정도 없으니 오늘은 오전에 집을 나서기로 했다. 여전히 겨울바람이 차다. 아침 일찍 찬 공기를 가르며 길을 걷다 보니 속눈썹에 방울방울 물방울이 맺힌다. 괜히 재미있어 닦지 않고 그대로 눈다. 속눈썹에 매달린 물방울 마스카라가 햇살에 반짝이며 내 시야에도 보인다. 어제도 걸었던 친정 가는 길을 거쳐 옛날 살던 동네 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곳곳에 다양한 추억이 머무는 곳이다. 그야말로 내 나와바리. 재개발에 들어간다고 표시된 큰엄마가 예전에 사시던 아파트를 지나, 고등학교 시절 학교 가는 길에 거쳐서 지나가던 사거리, 독서실에서 집으로 가던 길 노래를 부르며 지나가던 예전 살던 집 근처 골목까지 걸었다. 이 동네에 카페가 많이 들어섰더라고.


이른 아침이라 문 연 카페가 없을까 봐 미리 찾아보고 왔는데 임시 휴무이지 뭐야. 덕분에 근처에 있는 카페들 탐색에 나섰다. 네이버 지도를 켜고 주변에 있는 카페들을 따라 열심히 걸어봤지만 11시가 넘어야 문을 열기 시작한다. 영 없으면 큰길에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에 가면 되긴 한다. 개성 있는 카페들을 더 좋아하긴 하지만 안 되면 거기라도 가야지. 살짝은 허탈한 기분으로 마지막 골목을 지나가는데 문을 연 카페가 하나 보인다. 카페 문 앞에서 서서 살짝 경치를 보니 그림 그리기도 알맞다. 갑자기 신이 난다. 조용한 카페에 문을 열고 들어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잔 주문한다. 하... 진짜 추웠어.


옛날 학교 앞 문방구에 놓여있던 오락기 두 대와 롤러스케이트, 오래된 TV들과 옛날 잡지 사진들로 꾸며진 레트로 감성의 카페의 주인은 젊은 청년이다. 젊은 청년이 일찍 문을 열었네. 기특하게 생각하며 그림 그리기 좋은 자리를 하나 잡았다. 내가 좋아하는 구도인 카페 창문과 바깥 풍경을 그리며 오락기 두 대도 그려 넣었다. 밖에서 추웠던지 오늘은 그림을 그리는 중에도 따뜻한 커피가 식기 전에 홀짝홀짝 마셔 준다. 복잡하게 선을 그으며 혼자서 또 신이 난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루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스케치를 끝내고 팔레트를 펼쳤다. 그림자를 넣어주고 포인트가 되는 노란색, 주황색, 파란색을 먼저 칠해 준다. 나는 분명히 원색을 좋아한다. 옷장 가득 들어있는 원색의 옷들처럼 팔레트에서 내가 자주 꺼내 스케치북에 입히는 색들도 원색들이다. 이렇게 원색이 포인트가 되는 그림들을 나는 더 좋아한다. 덕분에 내 마음에 드는 그림이 완성되었다.


그림을 끝내고 시계를 보니 11시 50분이다. 12시 30분까지 올 거라고 마라탕 시켜 놓으라고 했는데 너무 오래 앉아 그림을 그리고 말았다. 1시간 거리를 40분 만에 가야 하게 생겼다. 서둘러 그림 도구를 챙겨 넣고 카페를 나섰다. 자꾸 걷다 보니 걸음이 빨라졌다. 힘들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걸어왔는데 20분이 지난 시점에 지도를 보니 반 이상 와 있다. 가을에 떨어진 은행과 새똥으로 더럽혀진 길을 걸으며 ‘이렇게 새똥이 많은데 지나가며 머리에 안 맞는 것만 해도 운이 좋은 거야’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 본다. 우리 아파트 동 앞으로 꺾어 드는데 12시 29분이다. 매일 밖에서 놀다가 약속시간 맞춰 들어오는 우리 아들 생각이 난다. 최대한 놀 수 있는 만큼 많이 놀고 급하게 집에까지 뛰어 들어오며 시간 맞췄다고 신나 하는 아들을 내가 너무 많이 닮아 웃음이 튀어나온다. 그 아들에 그 엄마인지. 그 엄마에 그 아들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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