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엄마는 여행가가 꿈이야

by joyfulmito

화가가 되고 싶었다. 일곱 살, 흔히 그렇듯 유치원에서는 그림을 많이 그렸고 처음으로 선생님께 내가 그린 그림에 대해 칭찬을 받았다. 언제나 칭찬 세례를 쏟아붓는 엄마에게 이미 그림 칭찬 한 번 안 받았을 리 없지만, 선생님께 받은 칭찬이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어깨가 으쓱해진 나는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되었고, 누군가 “꿈이 뭐야?”라고 물으면 주저 없이 ‘화가’라 대답하곤 했다.

그러나 화가라는 꿈을 현실에서 오래 지켜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경제력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을 하기도 전에 나는‘전공을 할 만큼 미술에 소질이 있는 건 아니야.’라는 결론을 내렸다. 왜 그런 결론을 내렸는지는 모르겠다. 그림을 배우고 싶다고 중학교 때 미술학원을 찾아갔었고 학원에서 그림을 배우는 것이 재미있었는데 말이다. 미술 시간마다 친구들 그림에 살짝 붓 터치를 얹어 심폐소생을 시켜주는 것도 재미있었고, 예술제에 작품을 제출하기 위해 주말에 학교에 모여 친구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는 것도 재미있었는데 말이다.

그즈음 영어가 더 재미있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영어에 열을 올리던 소녀는 영어교사를 꿈꾸게 되었고 10년 후 꿈에 그리던 영어교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늘 마음 한켠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꽤 여러 번 그림 그리기를 시도했다. 미술학원에 등록하기도 했고-오래 다니지는 못했지만-, 임신 중에는 하루 종일 포크아트에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정신없이 두 아이를 키우는 동안 나도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림은 더는 안 그리고 싶었다. 무의식 속에서 ‘난 재능이 없어. 그림은 더 손 안 댈 거야.’ 뭐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던 것 같다. 여러 번 시도했지만 좌절된 꿈 같이 느껴져 더 이상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태교의 영향인지 유전의 영향인지 딸은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삐뚤삐뚤한 동그라미와 몇 개의 선이 겹쳐져 만들어지는 아이의 그림은 놀라웠다. 그 나이에만 그릴 수 있는 사랑스러운 그림들이 날로 달로 발전되어 갔다. 그렇게 늘 그림을 그리던 딸이 엄마랑 같이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자꾸만 조르기 시작했다.

“네가 그리고 싶으면 혼자 그리면 되지 왜 자꾸 엄마한테 그리라고 해?”

“엄마는 이제 그림 그리기 싫어. 안 그릴 거야.”

하며 딸의 제안에 관심도 보이지 않았더랬다.

그러던 어느 날 여행 정보를 찾던 중 ‘어반스케치’라는 분야를 알게 되었다. ‘눈이 번쩍 띄었다’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걸까? 어? 이거 내가 하고 싶었던 건데? 이제 그림은 안 그리고 싶다고 하면서도 사실 마음속 깊은 곳에 늘 간직하고 있던 로망이 하나 있었다. ‘나중에 나이가 많이 들면 여행 다니면서 그림을 그리고 싶어.’라는…. 문득 나이가 많이 들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날 당장 스케치북 2권과 드로잉 펜 2자루를 주문했다. 그렇게 마흔 살 여름. 나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이 마흔에도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나는 가보고 싶은 곳이 너무나 많다. 그동안 정말 열심히 돌아다녔지만 가고 싶은 곳이 늘어나는 속도가 그보다 훨씬 더 빠르다. 내가 어릴 적 그 시절에 여행도 직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면 내 꿈은 아마 ‘여행가’이지 않았을까.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고 싶은 마음에 영어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여행이 흔하지 않던 시절, 역사에는 관심 1도 없던 내가 ‘답사’라는 두 글자를‘여행’이라 읽고 망설임 없이 고등학교 역사 탐구반에 들어갔었다. 역사 선생님의 설명은 귓등으로 흘리고 새로운 곳을 여행하며 혼자 신이 났더랬지. 중학교 수학여행 중 들렀던 장소가 워낙 많아서 친구들은 버스 탄 기억밖에 없다는데, 나는 갔던 곳들을 지금도 줄줄 읊는 걸 보면 그때도 나는 여행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것 같다. 뭐, 그렇다고 늦은 건 아니야. 지금부터 꿈을 꾸면 되지.

어느 날 문득 아들에게 “엄마는 여행가가 꿈이야.”라고 했더니, 아들이 대뜸 “엄마 사십 살이잖아.”라고 답한다. “요즘은 100세 시대라는데 마흔 살이면 엄청 젊은 거야.”라고 했더니 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그림 그리는 사람은 어때?”라고 제안한다. 그때부터 내 꿈은 ‘그림 그리는 여행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