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궁 여종의 무고에 속은 사헌부 물갈이
영원히 권좌에 군림할 것 같던 태상왕 이방원이 56세로 숨을 거뒀다. 5개월쯤 뒤에 방원을 낳은 이성계와 그 웃대의 신위가 봉안된 함길도 의천(지금의 원산) 본궁(本宮)의 원장이라는 여비(여종)가 어떤 일로 아들이 보는 앞에서 고을의 아전으로부터 욕을 들었다.
의천의 선군(船軍)이던 임성부가 그 장면을 보고, "세도를 믿는 자도 모욕을 당하는가."라고 빈정댔다(세종 4년 10월 9일)· 선군은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편성된 수군이었으니, 현역 해군이 왕실의 조상을 섬기는 노비를 희롱한 것이다.
원장이 성부에게 앙심을 품고서 단단히 복수를 해주기로 작심하고, 아들 개오미를 앞세우고 의천 군청을 찾아가, 태상왕이 죽은 뒤에 성부가 자기에게, "뒷배가 사라졌으니 네가 으스대던 시절도 끝났구나."라고 말한 것처럼 거짓말을 꾸며서 일러바쳤다.
왕실과 연결된 노비가 임금을 모독한 현역 군인을 고발한 것이니 군청에 비상이 결렸다. 군수 이진이 원장의 말을 듣더니, 불충에 해당한다며 성부를 잡아다가 원장의 말이 사실인지 물었다. 성부가 극구 부인하자 군수가 세 차례나 혹독하게 매질을 가하여 강제로 자복을 받아내 함길도 감사를 통해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임금이 사헌부로 하여금 사실 여부를 확인하게 시키니, 성부가 두 차례나 매질을 당하고도 혐의를 부인하였다. 개오미의 친구 두 명을 참고인으로 불러서 개오미로부터 들은 바를 물으니 둘의 대답이 달랐다. 한 명은 개오미가 의천 군수에게 고한 그대로 들었다고 하고, 한 명은 다르게 들었다고 하였다(세종 13년 6월 2일 반포된 <휼형교지> 참조).
그런데도 사헌부가 진실을 끝까지 규명하지 않고 마치 성부가 원장의 고소에 승복한 것처럼 조서를 꾸며서 임금에게 성부를 사형에 처하기를 청했다. 임금이 수사기록의 모순과 성부와 원장의 대질을 생략한 하자를 들춰서 의정부와 육조의 반응을 떠보니, 사헌부의 청대로 성부를 죽여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였다.
임금의 하명사건을 전담하는 의금부에 재수사 지시가 내리니, 원장이 거짓말을 꾸며서 성부를 무고한 사실을 자복하였다. 성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성부가 얄미워서 그가 죄를 덮어쓰고 두들겨 맞는 것을 보려고 성부를 무함하였다며, 성부가 사형을 면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임금이 즉시 성부를 석방하여 집까지 데려다주게 하고 원장을 장 1백대에 처하니 사람들이 스물여섯 살 젊은 임금의 총명에 탄복하였다. 그런데 훨씬 더 감동적인 일이 뒤따랐다. 곧바로 승정원이 분주해지더니, 대사헌 성엄·장령 신정리·지평 신계삼과 송저, 내섬시 판사 박안신 등이 의금부에 갇히고, 강원도에 경차관으로 나가 있던 권맹손과 의천 군수 이진이 서울로 압송돼 왔다.
박안신과 권맹손이 잡혀온 까닭은, 사헌부가 원장의 무고에 속아서 임금에게 성부를 사형에 처하기를 청하던 때에 두 사람이 각각 사헌 집의와 사헌 장령으로 있으면서 허수아비 노릇을 했기 때문이었다. 의금부가 국문을 시작하니, 사헌부 대관들의 안일과 무책임이 단번에 드러났다.
대사헌 성엄 등이 잘못을 뉘우칠 생각은 않고, 자신들이 고의로 성부에게 죄를 씌운 것이 아니라 성부가 고문도 하기 전에 스스로 자복하여 조사를 중지하였다고 구차하게 변명을 늘어놓자, 임금이 사헌부 대관들의 투미한 정신상태를 따끔하게 질타하였다.
옥사(獄事)를 처리할 때는 선입견을 완전히 버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물어야(허심청문·虛心淸問) 하는 것이다. 죽을죄이면 살릴 방도를 구하고, 중죄이면 형을 감해줄 구실을 찾으면서 실정을 살펴가며 죄를 처단하여도 실수가 따를 때가 있다. 그런데 사헌부는 성부가 임금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반드시 죽이기로 작심하고(욕살지심·欲殺之心), 말의 진위를 꼼꼼히 따져보지 않고 위엄으로 핍박하여 애먼 사람을 극형으로 몰았으니, 내가 그대로 따랐다면 죄 없는 백성을 죽인 꼴이 되지 않았겠느냐(세종 4년 10월 24일).
훈계를 마치더니 송저·신계삼·신정리·박안신·권맹손 등 다섯 명을 장 70대에 처하여 죗값을 돈으로 값을 수 있게 하였다. 대사헌 성엄은 원종공신이라 관직만 거두고, 의천 군수 이진은 장 70대와 노역 1년 반에 처하게 하였다. 나흘 뒤에 사헌부 대관(臺官) 다섯 명이 동시에 바뀌었다(세종 4년 10월 28일).
대관은 사헌부를 구성하는 대사헌(종 2품 1명)·집의(종 3품 1명)·장령(정 4품 2명)·지평(정 5품 2명)을 통칭하던 용어로, 오늘날의 대검찰청 검사와 감사원 감사관을 합친 개념으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대관 가운데 장령과 지평을 대장(臺長)이라 하였고, 대관 아래 감찰(정 6품) 25명이 있었다.
사간원을 구성하는 사간(정 3품 2명)·지사(종 3품 1명)·헌납(정 5품 2명)·정언(정 6품 2명)은 간관(諫官)이라고 일컬었으며, 사헌부의 대관 6명과 사간원의 간관 7명을 합한 13명을 대간(臺諫) 또는 대성(臺省)으로 통칭하였다. 대간은 정치와 행정의 잘잘못을 따지고, 임금과 백관의 허물을 간쟁 또는 탄핵하고, 임금이 관직에 내정한 관리의 인사검증(신원조회) 등을 담당하여, 언관(言官) 또는 이목관(耳目官)으로도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