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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작가 May 08. 2022

매일 30분의 점심 산책으로 수집한 미세 행복

태교일기 [33w6d] 딱풀이에게 보내는 15번째 편지 (D-33)


너를 맞이할 이 집은 동향이라 아침 해가 거실 깊숙이 들어오는 편이야. 하루의 시작을 재촉하는 집이지만, 엄마는 힘이 부족한 겨울 햇살 정도는 암막 커튼이 없이도 충분히 이겨내고 늦잠을 잘 수 있었지.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어제와 달리 눈부신 햇살이 유리창을 통과해 거실 깊숙이 들이닥쳤어. '2월 말인데 벌써?' 엄마가 너를 기다리며 이 작은 집에서 겨울잠을 자듯 숨죽여 지내는 동안 어느새 계절은 또 한 번 바뀔 채비를 한 모양이야.

새해를 맞이하는 기쁨으로 넘쳐야 할 때 세상은 참 시끄러웠어. 전투기, 탱크, 낙하산 공습 같은 단어 끝에 전쟁이라는 단어마저 언뜻 보이기도 했어. 산부인과에 떨어진 폭탄으로 임산부와 태아가 사망했다는 뉴스는 가슴이 아파서 차마 계속 볼 수가 없었어. 이렇게 세상이 제아무리 시끄럽고 혼란스럽다 한들 자연은 자기 속도대로 움직이려는 모양인지 봄 햇살을 쏟아냈어.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이제 탄천에 좀 나가봐야겠다.' 엄마는 조용히 중얼거렸어. 눈 가린 절망과 눈 가린 희망 사이를 시계 추처럼 왔다 갔다 하겠지만 결국 눈 가린 희망 편에 서겠다던 최승자 시인처럼 엄마 역시 봄을 맞이해야겠다 싶었어. 이러니 저러니 해도 창문을 활짝 열어 둘 따뜻한 계절이 또 오고야 말 테니.

24주 차가 되고 엄마는 드디어 집을 나섰어.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집을 나서서 집 근처 도서관에 도착하니 숨이 턱턱 막혀서 둘러볼 기운이 없었어. 그간 너를 지키겠다는 간절함에 너무 숨죽이고 지냈나? 책 내음이 가득한 공간에 앉아 잠시 쉬다가 지난겨울 출간한 책을 한번 검색해 보았어. 검색 화면에서 "대출 중"이라는 세 글자가 선명하게 보였어. 묘령의 독자가 엄마가 쓴 책을 읽고 있다니 얼마나 기쁘던지. 이처럼 너를 품고 나선 첫 산책은 여러모로 성공적이었어.  

첫 산책이 주었던 상쾌한 만족감에도 불구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꾀가 나기 시작했어. 안 되겠다! 엄마는 점심시간 산책길에 목적과 의미를 하나씩 부여해 보기로 했어. 어느 날은 산책 경로에 있는 토스트집이나 김밥집에서 점심을 테이크아웃하겠다는 목적으로,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날은 따뜻한 라테를 마시는 기쁨을 누리겠다는 일념으로, 또 어느 날은 전날 듣다 만 오디오북을 이어서 듣고 싶은 마음에 후다닥 외출 채비를 마치고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고는 집을 나섰어.

하루는 요조 작가가 쓴 글을 요조 작가의 목소리로 들으며 탄천변을 천천히 걸었어. 그녀의 정갈한 문장도 글에 담긴 따뜻한 시선도 조용한 목소리도 모두 좋았어. 다만, 들으면 들을수록 허기가 느껴지고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싶어 졌지. 그날 산책을 다녀와 먹은 점심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몰라. 엄마를 허기지게 만들었던 책은  ‘먹고사는 일’에 누구보다 진심인 작가들이 들려주는 일상 속 음식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요즘 사는 맛》이었어. 요리에 재능도 관심도 부족한 엄마조차도 이 책을 들으며 요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

점심 산책길에 만난 물소리와 바람 소리는 특별한 보너스 같았어. 컨디션이 좋아 평소보다 조금 더 걸었던 날은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풍경을 선물로 받기도 했어. 바쁘게 물길질을 하는 청둥오리 한 쌍과 물가에 흔들리는 강아지풀. 엄마가 선물 받은 이른 봄 풍경이야. 비도 내리고 바람도 불어 망설이다 비바람을 뚫고 점심 산책 루틴을 지켜낸 날은 엄마 스스로가 대견하기도 했어. 따뜻한 디카페인 커피를 마시는 기쁨은 물론 개인 용기를 챙겨간 덕분에 지구를 위해 작은 보탬이 되었다는 뿌듯함까지 얻었지.

매일 30분의 길지 않은 점심 산책으로 넘치게 수집한 미세 행복과 새로움은 차곡차곡 쌓여 그날 밤 감사 일기에 담겼어. 엄마가 혼자 걸었던 산책길을 딱풀이 너와 함께 걸을 날이 곧 오겠지? 그날이 되면 엄마가 느꼈던 기쁨과 행복을 너도 느낄 수 있겠지? 엄마가 자동차 운전은 그저 그렇지만 유모차 운전은 잘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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