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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은 Dec 27. 2020

나를 위로하는 피아노

정든 나의 악기

 

 오늘도 수업 시작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한 수강생이 ‘베토벤’이라고 쓰여있는 레슨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다른 레슨실이 있지만 꼭 이 레슨실의 피아노를 치고 싶어서 오늘도 일찍 집에서 나섰을 것이다.

 “저는 이 피아노랑 정이 들어서 서 꼭 여기서 하고 싶어요. 그래서 우리 남편한테 빨리 데려다 달라고 오늘도 보챘어요.”

 30분이나 기다리면 힘들지 않냐고 물어보는 내게 멋쩍게 웃으면서 말씀하신다. 나도 피아노와 정이 드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정’이란 것은 주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작용한다. 하지만 사물에 드는 정도 있다. 나와 함께 하는 물건에 애정을 많이 쏟게 되면 정이 든다. 피아노를 전공했으니 당연한 것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특히 피아노와 정이 많이 든다.  


 나의 첫 번째 피아노가 생각난다. 피아노 학원을 다니며 피아노를 배운 지 3년이 지났을 때 드디어 나의 피아노가 생겼다. 피아노를 사러 갔을 때 너무도 많은 피아노들 사이에서 정말 신중하게 고르고 골라 갈색의 빛나는 피아노를 선택했다. 피아노는 나와 친구가 되었다.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셔서 저녁까지 외로운 시간을 보내야 할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피아노를 치면 피아노가 나를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그런 피아노를 너무 아껴서 어린 남동생이 실수로 피아노에 상처를 냈을 때 너무 속상해서 엉엉 울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피아노 전공으로 대학에 입학하고 어릴 적 사용하던 피아노와 이별을 하게 됐다. 전공생이 쓰기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아노와 이별을 하는 것이 마치 오랜 친구와 헤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좋은 주인을 만나서 또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를 바라며 정든 악기와 힘들게 헤어졌다. 지금은 그랜드 피아노가 방에서 나를 기다린다. 피아노는 요즘 들어 나와 많이 정이 들었다. 레슨을 쉬고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은 요즘, 지친 나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피아노를 자주 만나러 가게 됐기 때문이다.


 피아노는 무게가 상당해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항상 같은 자리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 든다. 항상 같은 자리에 있는 나무처럼 말이다. 그동안 밖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서 피아노를 많이 치지 못했는데 아마 그동안은 나를 계속 기다렸을 것이다. 한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위로가 될 때가 있다. 피아노와 정이 들면 항상 같은 자리에서 기다리던 피아노가 나를 위로해준다.


 “선생님, 집에 있는 피아노가 우리 딸들 어릴 때 사준 건데 추억이 너무 많이 있어서 버리지를 못하겠더라고요. 한 30년은 된 것 같아요. 그 시간 동안 피아노가 항상 우리 가족을 지켜봤을 것 같아요. 그래서 버리지를 못하겠네요. 그래서 그냥 가만히 두느니 내가 배워서 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배우러 왔어요.”

 정든 악기와 차마 이별을 못하고 피아노를 배우러 온 수강생은 아마도 정이 많은 분일 거라는 예감이 든다. 그리고 집에서 소리를 다시 낼 수 있기를 기다리던 피아노는 이제 이 수강생과 정이 들기 시작할 것이다.




 가끔은 정을 쏟을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에 감사할 때가 있다. 정이 점점 사라져 가는 현대 사회에서 애정을 쏟을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정든 나의 피아노에 앉아서 연주를 하면 피아노와 내가 연결되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피아노는 나의 마음을 대신해서 아름다운 소리를 내준다. 피아노는 내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외롭거나 지칠 때도 항상 같은 자리에서 나를 바라보며 나를 위로해준다. 앞으로도 같은 자리에서 나를 지켜볼 것이다. 아직 악기와 정이 들어 본 경험이 없는 분들에게 악기와 나누는 정을 느껴보길 추천하고 싶다. 그러면 악기와 나는 친구가 되어 마음을 나눌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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