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을 구독한 지 일 년이 되었다. 종이 신문을 읽고 싶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했으나 한쪽으로 치우쳐진 내용이 많아 어떤 신문을 봐야 할지 고민되었다. 좌도 우도 아닌, 중도 합리주의 성향인 내가 마음에 드는 신문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취재 없이 재생산되는 그저 그런 포탈 기사에 지쳐가던 어느 날, 그래도 중간 언저리에 있는 듯 느껴지는 신문사를 선택해 구독을 시작했다. 투병 중에 포탈의 기사와 댓글들을 보고 싶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티브이 뉴스만으로는 부족한 무언가를 채우고 싶었던 것 같다.
어릴 적, 부모님은 신문을 챙겨보셨다. 나와 동생은 TV 편성표를 가장 먼저 확인했다. 이제, 신문에 TV 편성표는 없다. TV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으니 신문에서 사라지는 것은 당연하나, 이상하게 섭섭했다. 신문을 가져다주는 사람은 남편이다. 새벽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신문을 들고 와 서재 테이블 위에 둔다. 새벽부터 일을 하는 부지런한 누군가의 손을 거쳐 사랑하는 남편의 손으로 전달된 신문을 펼치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상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고민이 생겼다. 신문에 광고가 너무 많다. 깊이 있는 기획기사가 줄어들고 광고가 늘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계속 구독을 해야 할지 살짝 흔들리는 중이다. 한 달에 만 오천 원 값어치는 한다는 생각에 계속 읽고 있지만 말이다. 나는 종이를 만질 때의 촉감과 종이의 냄새가 좋다. 그래서, 아마도 신문을 계속 읽기는 할 것 같다.
IT 기획하는 사람이라고 하기에 나는 매우 아날로그적 취향의 소유자이다. 전화로 약속을 잡고 시간에 맞춰 친구를 기다리고 손편지를 주고받던 학창 시절을 거쳤고 대학 입학 후에는 '삐삐'를 쓰다가 몇 년 후에 처음 핸드폰이 생겼다. '018'로 시작하던 그 번호가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찌 되었든 나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그 중간 어디 즈음에 있는 양쪽을 다 겪은 세대여서 참 감사하다.
이런 내가 브런치를 좋아하는 것은 이상하게 이 곳은 사람 냄새가 나고 따뜻하다 느껴지기 때문인 듯하다. 누군가의 글을 구독하고 응원과 위로의 댓글을 남기고 때로는 어느 작가를 위해 기도하며, 나는 책장을 넘기고 신문을 만질 때와 같은 감성을 느끼는 것 같다.
몇 시간 뒤면 남편은 운동을 갈 것이고 돌아오는 손에는 신문이 들려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펼쳐보며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그 시작을 위해,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