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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Dec 25. 2021

11화. 무궁화호

오랜만에 무궁화호를 탔다. 기본학교 수업을 위해 서울에서 함평까지 이동하는데,  왕복 10시간 운전도 해보고 광주송정역까지 KTX로 이동한 후 ITX나 무궁화호로 갈아타기도 했다. 이런저런 시도를 한 후, 함평까지 한 번에 갈 수 있는 무궁화호를 이용하는 중이다.


무궁화호를 언제 처음 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릴 적 사이다, 삶은 계란, 빠다코코낫 등의 과자가 잔뜩 담긴 수레를 보며 부모님께 사달라고 졸랐던 기억이 있다. 돈을 내고 사 먹는 것이 아니라, 기차를 타면 그냥 주는 것인 줄 알았던 때도 있었던 것 같다. 이후 KTX 등 새로운 종류의 기차가 등장한 후로 무궁화호를 탈 기회가 없었다.


장거리 이동 시, 버스보다 기차를 선호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기차의 낭만! 뭐라 설명할 수 없지만 기차가 주는 낭만이 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좋지만, 열차와 열차 사이를 이어주는 공간에서 내다 보는 바깥세상도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KTX나 SRT에서 느낄 수 없는, 느리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풍경들과 온몸으로 느껴지는 덜컹거림이 있다.  


(좌)함평가는 길, 무궁화호 열차 속 시선 (우)서울오는 길, 무궁화호를 기다리는 시선


그리고, 그 속에는 차비를 아끼려 무궁화호를 탔던 과거의 내가 있다. 열정이 넘치던, 언젠가는 비행기를 타고 다닐 것이라 다짐했던 어린 내가 있다. 세월이 흘러 여유로워지고 안정된 내가 그때의 나와 마주했다.


무궁화호 1호차 12번에 앉아 고개를 드니 노트북 가방이 보인다. 데스크톱을 사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던 나를 기억한다. 기차는 덜컹거리고 꿀렁거리며 "열심히 살았어. 기특해."엉덩이를 두드려준다.


수업을 마치고, 기차를 기다리는데 낮은 플랫폼 위로 노을이 진다. 꾸밈 없는 날것 같다. 이 길의 끝에 사랑하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나는,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풍경에 취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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