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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Dec 28. 2019

하나의 사건에 수많은 인간들이 실처럼 얽혀있다

 _미야베 미유키 「이유」

평소 얇은 책을 좋아해서, 너무 좋아하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다시 보길 미뤄왔다. 그러다 부산 출장을 떠날 때 챙겼다. 분명 일주일이면 읽을 수 있겠지... 700페이지다. 그리고 부산 출장 중에 결국 다 읽었다.



다큐멘터리와 같은 형식이다. 다큐멘터리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다. 지루하다는 점, 그리고 정보가 많다는 점. 이 책도 마찬가지다. 도입부부터 정보로 넘친다. 그래서 시작할 때 조금 집중해서 읽어야 한다. 처음만 지나면 바로 재미있어진다.


추리소설의 대가,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 중에 가장 좋아하는 책이다. 한 고급 아파트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둘러싼 이야기를 다룬다. 연관된 인물들이 많은데, 그들의 인생 이야기가 다 나온다. 인터뷰 형식으로 들려준다. 워낙 많은 사람들 이야기가 나오니, 700페이지의 두꺼운 책에서 낭비되는 부분이 하나 없다.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도 각자 처한 상황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니 이렇게 이야기가 넘쳐나는 것이다.


자석이 쇳가루를 끌어 모으듯 '사건'은 많은 사람들을 빨아들인다. 폭심지에 있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제외한 주위의 모든 사람들, 이를테면 각자의 가족, 친구와 지인, 근처 주민, 학교 친구니 회사 동료, 나아가 목격자, 경찰의 탐문을 받은 사람들, 사건 현장에 출입하던 수금원, 신문배달부, 음식배달부 등, 헤아려보면 한 사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는지 새삼 놀랄 정도다.


많은 사람들이 나오고, 다들 나름의 가족을 구성하고 있다. 단순히 좋다 나쁘다로 형용할 수 없는 입체적인 관계들이다. 관계에 대한 묘사, 인간에 대한 묘사로 저자가 인간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를, 미루어 알 수 있다. 대단한 작가다.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이시다는 도망친다. 도망치면서 어머니인 기누에에게 전화를 하는데, 그 긴장감이 그대로 느껴진다. 저자의 세밀한 필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엄마." 하고 전화 저편에서 이시다 나오즈미는 말했다.
기누에는 웃음을 거두었다. 요즘 나오즈미는 기누에를 '할머니'라고 불렀다. 자기 자식인 나오키와 유카리가 그렇게 부르니까 그도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가누에도 그를 '아빠'라고 부른다. '너'라고 부른 일은 있어도 좀처럼 '나오즈미'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이시다 가는 아이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가정이므로 가족의 호칭도 아이들 처지에서 본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오즈미는 가누에를 '엄마'라고 불렀다. 겁에 질린 아이처럼.
가누에는 목소리를 꿀꺽 삼키고 서 있었다. 수화기를 꼭 쥔 손가락이 차갑게 굳어가는 것을 느꼈다.
"엄마." 하고 나오즈미는 다시 한 번 말했다. "나, 큰일났어요."


흥미진진한 추리소설이지만, 재미에 그치지 않는다. 부동산 등 사회문제를 다룬다. 사회파 소설이면서 등장인물 개개인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은 덩어리에서 거대한 이야기를 끄집어 내고, 큰 덩어리에서 자잘한 이야기를 끄집어 낸다.


★★★★★ 재미있다. 중간에 멈추기가 어려워서 늦게 자게 된다. 처음에는 조금 인내력이 필요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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