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다. 역시 비 오는 날은 바깥이 보이는 카페를 찾게 된다. 빗소리까지 잘 들리면 금상첨화겠지만, 보통은 카페 음악소리에 묻힌다.
여자친구를 기다리며 책을 읽는다. 노오란 무지 펜으로 밑줄을 죽죽 긋는다. 얼마 전까지도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한창이었다. 매일 같이 입는 유니클로 옷도 새로 사지 않고 있다. (새로 사지는 않아도 입고 있는 건 여전히 유니클로다.) 무지 노란 펜은 도무지 대체제가 없다. 이 정도 굵기가 딱이다. 줄을 상당히 많이 긋기 때문에 생각보다 금방 쓴다. 아직 사용가능한 노란 펜이 2자루 남았는데, 이거 참...
지금 찾아보니 온라인에서도 판다. 가격도 저렴하고 모양도 세련되고 색상도 깔끔하고 굵기도 적당하다. 이 펜 앞에서 나는 친일파가 되... 면 안되... 는...
이 책을 읽은 사람이 되고 싶다
책을 읽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나는 시기별로 목적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이 책을 읽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이 책 저 책 다 빌리고, 그 책을 읽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열심히 읽었다. 재미없는 책이 걸리면 포기하기도 했지만, 관심이 있는 주제라면 일단 빌렸다. 학교 도서관은 10권까지 대출해주었는데, 항상 10권까지만 고르기 위해 고민하곤 했다. 다 읽고 나면 뿌듯했다. 책 내용에 대한 기억은, 뿌듯한 느낌만큼 빨리 사라졌다.
이 책에 대해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싶다
독서모임을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이야기하기 위해 읽었다. 인상 깊은 부분은 포스트잇으로 붙이고 어떻게 이야기할까 생각하며 두근두근 설렜다. 이렇게 읽으면 장점이 있다. 끝까지 읽었다고 그냥 덮어버리지 않고, 재미있었던 부분, 말하고 싶은 부분을 다시 한 번 보면서 정리하게 되었다. 완벽하게 정리가 되지 않아도 이야기를 하는 건 가치가 있다. 한 번이라도 내 입을 통해서 나간 문장은 나중에 다시 떠올리기 쉬웠다.
이 책을 글로 정리하고 싶다
그 다음 시기에는 블로그(정확히는 브런치)에 재미를 붙였다. 빨리 읽고 독후감 쓰고 싶어서 열심히 읽었다. 내 언어로 바꿔서 적고 나면, 진짜 내 사상이 된다. 생각지 못한 발견도 있었다. 이전에는 정보나 입장을 얻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언어로 바꾸는 걸 중요시했다. 그런데 책을 읽고 블로그를 적다 보니, 내가 책의 문장 자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쓰는 독후감이라는 건, 아주 단순한 형태다. 책에서 좋았던 문장을 옮기고, 감상을 덧붙인다. 그런데 이때 옮겨 적는 책의 문장이 너무 좋은 거다. 저자 고유의 표현. 그게 좋았다.
밑줄, 노오란 밑줄을 치고 싶다
요즘에는 밑줄 치는 맛에 읽는다. 위에서 말한 무지 노란펜이다. 처음에는 아주 좋았던 부분에만 밑줄을 쳤다. 그래서 좋아하는 책에는 밑줄이 아주 많고, 심한 경우에는 페이지 마다 밑줄이 한 번은 있다. 반대로 별로다 싶은 책에는 밑줄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밑줄이 목적이고 책은 수단에 불과하다. 그래서 나 자신과 타협하는 경우가 종종 찾아온다. 분명 아주 좋은 문장은 아닌데, 그렇다고 이 문장에 밑줄을 안 치면, 이 책에는 밑줄 칠 부분이 별로 없다. 그러면 좋은 문장의 기준을 조금 낮춘다. 상대평가를 하는 것이다. 책마다 나름의 기준을 잡아서, 이 정도 문장이면 이 책에서는 좋은 문장이지, 하며 밑줄을 긋는다.
내 첫 번째 취미는 책 소유다. 두 번째 취미는 원래 책 읽기였는데, 이제 밑줄 긋기가 되었다. 세 번째 취미가 포스트잇 붙이기, 네 번째 취미가 독후감 쓰기, 다섯 번째 취미가 독서모임이니, 책 읽기는 이제 여섯 번째 취미가 된 셈이다.
책 읽기 보다 밑줄 긋기가 취미인 건 나 혼자만의 이야기는 아닐 거다. 「88만원 세대」로 유명한 우석훈에 의하면 이는 대한민국 입시의 특성에서 기인한다.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하니, 낙서하거나 이쁘게 노트 필기하는 데 관심을 돌린다고나 할까. 나는 입시공부도 재미있게 했는데, 마흔 다 되어가는 시기에 갑자기 노란 무지 펜에 빠지게 되다니, 도대체 무슨 연유일까. 친일 잔재일까...
별 상관이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10대들이 가장 선호하는 선물 중의 하나가 여러 가지 색깔의 필기구 세트이다. 너무너무 공부를 하기 싫어서 책에 갖가지 색깔로 밑줄을 치고 온갖 색상의 포스트잇을 붙이는 10대 때의 경험이 종이책과 전자책을 (아직까지는) 물질적으로 구분해준다. 하기 싫은 사교육 위주의 공부를 하다 보니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이런 독특한 문화적 습관이 생겨난 듯하다. 전자책을 볼 수 있는 단말기가 미국과 달리 확산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런 문화적 이질성 때문은 아닐까? _우석훈 「문화로 먹고 살기」
암튼 밑줄 긋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닐 거다.
단 하나의 밑줄이라도 그을 수 있다면 책값을 충분히 회수하고도 남는 성과를 올릴 수 있다. _도이 에이지 「그들은 책 어디에 밑줄을 긋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