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와 다방의 역사에 대한 책이다. 신기하게도 저자 2명은 사제지간이다. 습관적으로 책을 내는, 강준만은 학생들의 리포트를 모아서 책을 내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제자와 함께 책을 냈다. 커피 덕후인 오두진이 자료를 모으면, 강준만은 이를 정리하고 재구성해서 글을 썼다. 표지는 정말 최악이다. 시기별로 간단히 정리해보았다.
제1장 '개화'와 '근대'의 바람을 타고(1896∼1944)
널리 알려졌듯이, 커피가 조선에 처음 들어온 건 고종 때였다. 고종은 러시아인 손탁의 권유로 처음 커피를 마시게 된다. 손탁은 사교계의 여왕이었는데, 고종의 신임을 받아서 손탁호텔을 짓고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손탁호텔에 최초의 다방이 만들어졌다. 이 호텔과 다방은 외국인 접대를 위한 것이었는데, 재미있는 건 「톰 소여의 모험」으로 유명한 마크 트웨인도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종군기자로 방문했다는 사실이다.
이때는 일본식 다방, 깃사텐이 들어섰다. 일본인이 많은 명동부터 다방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카카듀, 멕시코다방, 비너스다방, 제비다방, 엘리자 등의 이름의 다방이 생겼다. '제비다방'은 시인 이상이 경영했던 다방이다. 대부분의 다방이 경영악화로 망했는데 주로 외상 때문이었다. 외상이 있다는 것 자체가 지금은 흔치않은 일이다. 다방이 망할 정도로 외상이 많았다는 것은 분명 당대의 정서를 반영하는 것 같다.
본래 '멕시코다방'은 돈을 벌어 수익을 내겠다는 목적보다는 젊은 문화 예술인들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고자 하는 뜻으로 세워져, 좀 더 많은 이들이 함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아침 11시부터 문을 열어 밤늦게 손님이 끊어질 때까지 문을 열어 두었다(실제로 '멕시코다방'의 2층은 영화 및 연극배우 등이 연습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가난한 예술인들은 차를 마시고 그때그때 찻값을 낼 수 없었다. 그러나 보니 외상이 매우 잦았다. 때문에 1931년 8월 '멕시코다방'이 문을 닫을 무렵에 확인된 외상값만 해도 자본금(1천4백 원)을 두 배가 넘는 3천5백 원이나 되었다.
_강준만, 오두진 「고종 스타벅스에 가다」
이때부터 이미 커피값은 밥값보다 비쌌다.
'모던 보이'들이 자주 드나들던 카페에는 다방에서 파는 커피 외에 술을 팔기도 하였는데 여자 종업원들이 옆에서 술을 따르고 시중을 들었다. 당시 카페에서 팔던 커피 한 잔은 10~15전, 맥주는 한 병에 40전으로 설렁탕 값보다 비쌌다. 조선인 남자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 대개 60~80전이었으니 일반 서민들에게 있어서 카페에 출입한다는 것은 그림의 떡이었다.
_강준만, 오두진 「고종 스타벅스에 가다」
제2장 '사랑방'에서 '다방'으로(1945∼1959)
해방이 되고 나서는, 군용보급품을 통해서 커피가 사람들에게 퍼졌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먹지 않고 버리거나 쌓아두었다. 일부는 방향제로 쓰이기도 하고, 나중에는 회충약이라는 인식이 생겨서, 약처럼 먹기도 했다.
그게 바로 회충약이라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었다. 한 여름 뙤약볕에서 뛰어놀다 집에 들어오면 가끔씩 어머니께서는 그 약을 진하게 찬물에 타서 마시게 했다. 그걸 마시고 나면 영락없이 싸르르 배가 아파오고 곧 설사를 했다. 우린 뱃속에 있는 회충이 금세 녹아 그렇게 줄줄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믿었다. 학교에서 배급해주는 산토닝 회충약도 꼭 그랬으니까. 그땐 횟배를 앓는 아이들이 꽤 많았다. 그런 녀석들은 그 약을 호주머니에 넣고 있다가 뱃속이 수상하다 싶으면 그걸 꺼내 혀로 쓱쓱 핥아먹기도 해였다.
_김민환
다방은 이제 지식인들의 집합장소가 되었다. 방송업체계와 영화업계도 주로 다방을 이용해서 사람을 만났다. 명동이 핫해지고 사람이 많아지자 가난한 영화인들은 충무로로 쫒겨났다.
전쟁 이후 물가가 솟자, 정부에서는 커피 요금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다방 업계에서는 반발하면서 몰래 올리기도 한다.
언론을 보면, 당시 노동에 대한 인식을 볼 수 있다. 지금 노동은 권리에 가깝지만, 당시 노동은 의무에 가까웠다.
현재 서울 시내에는 100여 개소나 되는 다방이 있는데 시내 명동 모다방 조사에 의하면 매일 평균 드나드는 사람의 수는 350여 명이라고 한다. 그러면 시내 전 다방의 출입자 총수를 따지면 무려 3만여 명이나 되는 셈이다. 그들 중에서 매일같이 오는 사람, 남들은 일터로 나가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에 다방으로부터 다방을 찾아다니는 직업이 없는 사람이 한 집에 100여명이나 될 것이라고 하니 한심한 일이다.
_동아일보 「다방-아침부터 출입 빈번, 다방은 안식처」 1947-11-23 기사
제3장 '커피 단속'에서 펄시스터즈의 「커피 한 잔」까지 (1960∼1969)
다방은 원래 지식인들의 공간이었지만, 실업자들도 많았다. 동시에 사기꾼들의 공간이기도 했다.
쿠데타 이후, 검소한 생활을 이유로, 커피가 금지되기도 했다. 팔지 않겠다고, 다방에서 이야기 했으나, 실제로는 몰래 팔았다. 대부분 미군 PX에서 공급되었다.
커피가 금지되자,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인기는 더 올라갔다. 외국인을 통해서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미군 트럭이 도난당하는 일도 발생했다.
모닝커피가 유행했는데, 커피에 계란 노른자를 넣고, 휘휘 저은 후 참기름을 한두방울 떨어뜨려, 아침에 마시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다방을 사무실처럼 사용하면서 다방 전화를 이용해서 연락했다. 레지들이 사실상 비서 역할을 수행했다. 옛날 드라마에서 비슷한 광경을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지금의 공유오피스가 하는 역할을 수행했으니, 1960년대의 위워크라고 할 수 있겠다. 젊은이들의 맞선, 미팅 장소도 주로 다방이었다.
1967년 체신부 조사통계에 따르면, 전화를 가장 많이 쓰는 업체 1위는 관공서나 일반 기업들이 아니라 다방이었다.
_강준만, 오두진 「고종 스타벅스에 가다」
다방의 수가 5000개가 넘어가고, 경쟁도 심해졌다.
제4장 「찻집의 고독」에서 '맥스웰 하우스 커피'로(1970∼1979)
당시는 정부에서 경제를 주도했고, 커피 산업도 반도체 산업과 마찬가지로, 정부에서 기업을 하나 정해서 육성했다. 그렇게 동서식품은 멕스웰 하우스라는 이름으로 인스턴트 커피를 만들었다. 집에서도 커피를 마시기 시작하자, 다방은 변화를 겪게 된다. 미인계에 더욱 중점을 두게 된 것이다. 얼굴이 이쁘고 사교성이 좋은 마담, 레지 등이 손님을 많이 끌고 매상을 올리는 방식이었다. 사실상 이들이 다방의 매상을 결정지었다. 음악전문다방이 생기고, DJ가 노래를 틀었다. 이 때 대마초 흡연이 다방에서 이루어지면서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다.
커피는 접대의 순간 반드시 필요한 필수품이 되었다. 거래처가 계속해서 방문하는 사장, 학생의 집에 방문해야 하는 교수는 하루에 수십잔의 커피를 마시며 고통을 호소하기도 했다.
커피가 워낙 귀물이었기에 빚어진 우스꽝스러운 해프닝들도 맣았다. 부산의 「국제신보」 73년 1월 27일자가 보도한 한 회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 회사에서는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일일이 커피를 대접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사장이 손님 혼자 커피를 마시게 하는 것은 큰 실례라고 생각한 사장이 방문하는 손님과 일일이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장은 하루 수십 잔 마신 커피의 후유증(?)으로 인해 속은 속대로 쓰리고, 밤이면 잠이 오지 않아 멍하니 뜬 눈으로 밤을 지새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어 급기야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신문에 광고를 내고 자시 대신 하루에 커피 20잔을 마셔줄 여비서를 구한다는 광고까지 냈지만 하루에 20잔의 커피를 마셔낼 금붕어 같은 아가씨가 없어 고민 중이라면서 이 자리에서 배겨낼 하마 같은 아가씨가 없겠느냐고 하소연했다는 것이다.
_강준만, 오두진 「고종 스타벅스에 가다」
어느 여학교 교사가 학기 초 가정방문을 나갔을 때 그 날 마신 커피가 12잔이었다고 한다. 어쩌면 열두 집이 하나도 빼놓지 않고 묻지도 않고 커피를 내오고 '어서 드세요', '식기 전에...' 하고 커피 마시기를 강요하는지 참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_조선일보 「이런 것은 고치자 - 묻지도 않고 내놓는 접대용 커피」 1973-07-08 사설
일부 가게에서는 커피와 담배를 함께 끓여서 내놓기도 했는데, 이른바 꽁초 커피로 불리면서 문제가 되었다.
주로 당시 다방에서는 고객을 유치하기 위하여 다방 고유의 커피를 만들기도 하였는데, 다방마다 독특하게 '맛을 낸다', 혹은 '빛깔을 낸다'며 담뱃가루와 소금 그리고 계란 껍질까지 넣어 사람의 몸에 해로운 비위생적인 이물 혼합으로 고객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검찰 수사결과 드러난 주방장들의 수법은 대부분 커피의 양을 늘리면서도 맛과 빛깔은 레귤러 커피와 같게 느껴지도록 하는 속임수였다. ... 담배 3분의 1개비에 커피 원료 10잔 분을 넣어 끓이면 20~25잔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고 한다.
_강준만, 오두진 「고종 스타벅스에 가다」
프리마가 개발되면서 커피 믹스는 더욱 대중화되었다. 자판기가 등장했고, 이제 초등학생도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이때까지는 커피가 보약과 같은 이미지였기 때문에, 어린이가 먹는 것을 딱히 문제삼지 않았다.
제5장 안성기의 미소, 자판기 커피의 전성시대(1980∼1989)
인스턴트 커피 중에서도 고급인 맥심이 시장에 나왔다. 다방은 음악이나 그림으로 분위기를 바꾸고 전문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카페(젊은이들의 취향에 맞는 다방), 음악다방, 화랑(미술 작품이 많은 다방) 등으로 분화했다. 다방의 연령대별 구분도 심화되었다.
나름의 방식으로 특화해 나가는 도시의 다방과 달리, 변두리에 있는 다방은 음란한 형태로 변화하기도 했다. 정치적으로 혹독했던 만큼, 성산업에는 관대했기 때문에, 이발소나 다방에서도 성적 서비스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원두커피 전문점이 등장했는데, 최초는 '쟈뎅'이었다. 인스턴트 커피는 동서식품이 독점하고 있었는데, 네슬레가 진출해서 경쟁을 시작했다.
제6장 커피 전쟁과 커피의 고급화(1990∼1999)
동서식품과 네슬레의 커피 경쟁이 시작되었다. 경쟁적인 광고 경쟁을 벌이다, 허위과장광고라며 고발하기도 했다. (네슬레와 합작하고 있는) 두산그룹에 대한 불매운동이 벌어지면서, 동서식품이 앞서나갔다.
사무실마다 자판기가 보급되고, 커피전문점이 많아지면서 다방은 쇠퇴기를 맞이했다.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은 셀프서비스여서 손님이 직접 커피를 가져가야 했다. 이때 커피전문점에서는 커피 리필이 가능했다.
캔커피가 인기를 끌기 시작하자, 컵커피, 병커피 등으로 분화되고 고급화되기 시작했다.
IMF를 맞아 커피 시장도 위기를 맞이했다. 경기가 안좋아질 때마다, 외화 낭비로 몰려, 커피 안마시기 운동을 벌였기 때문이다.
스타벅스가 이화여대 부근에 1호점을 열었다. 진출 당시에는 에스프레소 업계에 경쟁자가 없었다.
제7장 '국민음료'로 등극한 커피(2000∼2005)
동서식품과 네슬레의 광고 전쟁은 계속되었다. 맥심은 남성 모델을 기용해, 가족과 연인을 강조했다. 초이스는 여성 모델을 기용해, 도시적이고 지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보여줬다.
우리나라는 인스턴트 커피의 품질이 워낙 좋아서, 인스턴트 커피와 원두커피의 비율이 9 대 1에 달했다.
농촌에서는 성적 서비스를 판매하는 티켓다방이 흥했다. 스타벅스가 영업을 시작하면서 테이크아웃 문화도 일반화 되었다.
★★★★★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 (현대파트는 노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