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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시시 Mar 08. 2022

시퍼런 놈에게 욕지거리 들으시던 그분..

사전 투표소에서 생긴 일

코로나 확진자의 급증으로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역시, 같은 이유로, 선거날이 아닌 사전 선거날 투표를 했습니다. 남편은 저보다 하루 빠른 금요일에 했기에, 다음 날은 토요일은 저 혼자 가야 했습니다. 아직은 새벽 공기가 차가운 겨울이 남아, 새벽 6시는 꽤나 어둑어둑했습니다. 바람은 또 어찌나 세게 불던지요. 상가 옆에 걸린 학원 현수막은 마구 펄럭이고, 매일같이 푸르름을 자랑하던 나무가 어두운 새벽에는 공포감을 조성할 뿐이었습니다.  마구 휘어 불어오던 바람 속에 나뭇잎이 섞여 날아가기도 했습니다. 지나가는 행인도 보이지 않아, 새벽시간 경비실을 찾은 오토바이 퀵맨이 참 반갑게 느껴졌습니다. 투표소까지 약 5분. 토요일마다 새벽 축구를 하러 나간 남편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길게만 느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전날에 사람이 꽤 있어서 투표하러 갔다가 포기했는데, 오늘(토요일)은 시간을 잘 맞추었는지 제 앞에 네다섯 명의 사람이 줄 서 있었습니다. 안내데스크 직원의 지시에 따라


1. 손 소독 젤을 바르고

2. 한 손에만 비닐장갑을 끼고


줄을 섰습니다. 이제 제 앞에는 한 명으로 세 줄었습니다. 이미 투표를 마치고 가는 사람도 있었고, 이제 막 투표를 마치고 투표소를 성큼성큼 걸어 나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잠시 후, 저와 눈높이가 얼마 차이 나지 않는 한 남자가 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갑니다.


“씨OOO야!”


'새벽부터 친한 친구랑 투표하러 왔구나, 이른 시간인데 공공장소에서 표현이 격하네, 참 시끄럽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악을 쓰며 소리칩니다.


“네가 나 치고 갔지! 왜 치고 가~!”


카키색 하프 패딩을 입은 그 남자는 소시지처럼 약간 통통해 보였는데, 분노로 가득 찬 얼굴은 금방이라도 칠 기세였습니다. 도대체 어떤 상황이었길래, 저 남자가 저렇게까지 화가 났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 겁이 났습니다. 보고 싶지 않은,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이 두려웠습니다, 경찰에 신고할 생각도 하지못할 정도로요.

곧이어, 그 남자를 화나게 한 것도 모른 채 느긋하게 투표소 밖 계단을 향해 유유히 걸어가려던 상대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감히 ‘그 남자’라고 말하기엔, 너무도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우리 세대 부모님 연배의 어르신이었습니다. 새벽시간이라 모자를 가볍게 눌러쓰신, 그 어르신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돌아봅니다. 그리고, 자식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새파란 놈이 욕지거리 해대며 두 눈을 부릅뜨는 상황 속에서, 몹시 당황한 기색이었습니다.

제가 만약 힘센 장정이었더라도 이 순간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혈기왕성한 그 남자의 눈빛이 정상이 아닌 것 같았거든요. 건드리기만 하면 가만 안 둘 것 같은 그런 매서운 눈이었습니다. 그때 용기를 낸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안내 데스크 직원이었습니다. '한 손에만 비닐장갑을 끼라'알려주바로 그 직원이요.


“여기서, 이러시면 안 돼요! 나가서 하세요, 나가서~”


처음엔 이 역시 무책임한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곧 정말 지혜로운 분이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한 마디 개입이 없었더라면, 사고는 순식간에 났을 테니까요. 그분의 말 한마디로, ‘그 남자’는 잠시 한 템포 쉬었고,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있음을 의식했습니다. 하지만 주눅 들지 않고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어르신을 향해 욕지거리와 자신을 ‘건드리고’ 간 것에 대한 화를 격하게 표출합니다. 비닐장갑을 끼라고 말하던 직원의 언성까지 높아지니, 드디어 투표소에서 한 남자 직원이 나타납니다. 투표소 안 쪽에서 불길한 예감을 느낀 건지 누군가 이야기를 해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곧이어, 그 어르신의 부인으로 보이는 할머니 한 분도 나왔습니다. 저처럼 두려움이 가득한 눈이었습니다. 인상 고우시고, 따스함마저 느껴지는 얼굴이었습니다.




“신분증 갖고 오시라니까요.”


저를 몇 번 불렀나 봅니다. 너무 긴장이 되고 겁이 나서, 직원이 저를 부르는 소리를 못 들은 것 같습니다. 저는 부랴부랴 신분증을 건네고 투표를 하러 갔습니다. 투표소 남자 직원이 나간 이후로, 밖은 조용해졌고, 그 직원은 얼마 안 되어 다시 돌아왔습니다. 도장을 찍고 투표함에 투표용지를 넣을 때, 무슨 정신으로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사건 당사자도 아닌데, 저는 여전히 두 다리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고, 위아래로 기모 옷을 입고 겉에는 긴 패딩잠바를 입었기에 너무 더워서인지, 아니면 긴장을 했기 때문인지모를.. 식은땀도 났습니다.


단 몇 분만에 큰 일을 치르고, 목격하고 집에 돌아오는 발걸음은 여전히 무겁고 무서웠습니다. 단지, 폭력을 목전에서 목격할 뻔한 위기를 넘겼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이른 시간부터 ‘그 남자’에게 욕지거리를 들으며, 한마디 말도 못 하고 가만히 듣고 경계의 태세를 갖추고 싶으나, 순전히 무방비 상태에 놓여있던 그 어르신이 자꾸 생각났으니까요.


몇 해 전, 딸아이 학교에서 옆 반 담임교사가 퇴출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학부모들 말에 의하면, ‘차별’을 했다는데, 그게 과연 진실일지도 의문입니다. 소문이 진실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아이들 앞뒤 안 맞는 정황을 부모들이 껴맞추다보면 없던 문제도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요. 때문에, 그 선생님은 결국 사직하셨고, 정신과 치료와 상담을 받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늘 사전 투표소에서 뵈었던 '그분'은 괜찮으실지 걱정이 됩니다. 자식한테 존경을 받으며 살아오셨을 것같이 점잖으신 인상의, '그분'이 말입니다.

단지, 다른 사람의 일일 뿐일까요?

저희 부모님, 또 저 역시.. 그런 상황에 놓이지 않으리란 법이 있을까요? 세상에 좋은 이들도 많지만, 더러는 눈살을 찌푸리다 못해 인상을 쓰게 만드는 이들이 있기에 사회는 '흉흉하다'는 소리를 합니다.


오늘은 투표소에서 뵈었던 그 어르신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는 하루였습니다. '그분'의 오늘 하루가 어땠을지, 그 충격을 어떻게 이겨내고 계실지, 무엇보다 집까지 무사히 가셨을지.. 내내 걱정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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