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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Apr 22. 2019

느리게 살겠다는 약속

꽃처럼 피고 지는 것들의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멈춘다.

 봄비가 온다. 땅으로 스며들어 냉랭함을 녹일 것이다. 채 풀지 못한 응어리를 털어낸 듯 봄의 대지는 한없이 말랑해진다. 흠뻑 적시고 나면 물길이 생긴다. 봄비가 스스로 길을 만들고 나아간다. 사연을 얘기하듯 소리를 만든다. 물길이 내는 소리는 나름의 속도가 있다.


 단순한 일을 반복하는 것은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다. 오랫동안 집중할 수 있는 힘도 있다. 하루 24시간을 꼬박 의자에 앉아 있을 수도 있다. 마음이 동의한 일이라면 꾸준히 지키는 편이다.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도 그렇고 식사를 하는 시간, 잠을 자는 시간까지 대부분 정해진 시간이 있다. 우리 부부의 싸움은 대부분 시간과 속도에 대한 싸움이다. 집을 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스토브는 껐는지 전등 스위치는 다 내렸는지를 확인해야 하는 주부의 사정을 이해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모든 경우의 수까지 계산해서 5분 전에 나갈 준비를 마쳐야 한다는 나만의 강박증이다. 약속 시간 30분 전에 도착한다. 약은 의사의 처방대로 하루 세 번 시간을 지켜서 먹는다. 신라면을 끓일 때도 면발이 익었는지 확인해 본 적이 없다. 그냥 레시피대로 타이머를 맞추고 4분을 끓인다. 낯선 곳에 가거나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을 할 때면 잘 부딪힌다. 이사를 하는 날이나 물건을 조립하는 날은 어딘가 부딪혀서 멍이 들거나 피를 흘린다. 생각보다 몸이 빨리 움직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불균형이다. 음식을 먹는 속도도 빠르다. 때로는 음식을 준비하는 긴 시간 동안 들였을 마음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한 것 같아서 미안하기도 하다. 내 몸의 속도가 생각의 속도를 감당할 수 없을 때가 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속도가 있다.


 나의 걷기는 느리게 살겠다는 약속이다. 걷기 위해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나는 발가벗듯 그 어떤 것으로도 꾸미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완고하게 쌓아둔 은폐물의 뒤로 숨지 않겠다는, 원초적인 나로 돌아가서 다시 출발선에 서겠다는 나의 의지이다.

같은 길을 걷다 보면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모든 사람에게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장점과 단점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장점만을 보거나 단점만을 본다. 나의 장단점이 나를 빛나게 하기를, 누군가에게 닿아 그 사람을 빛나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몸이 젖는 느낌이 좋다. 아무리 그래 봐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속도이다. 운명을 바꾸는 걸음, 무능을 치유하는 걸음, 미래를 살리는 걸음을 내딛는다. 심장 박동수가 빨라질수록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것에 용기를 내게 된다. 그리고 나를 혹사하는 설교가 시작된다. 내가 말랑해질 때까지 걷는다. 생각에 지지 않겠다는 속도의 조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소한 것, 작은 것, 약한 것에 소홀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꽃처럼 피고 지는 것들의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멈춘다. 한없이 느려지는 순간이다. 때로는 무릎을 꿇고 하늘을 담고 살겠다는 나만의 예배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의 젖이 말라 젖동냥을 해서 자랐다고 한다. 자주 경끼를 했다. 지금은 단어조차 생소한 단어가 어린 나를 위축시켰던 것 같다. 크면서 그런 증상들은 없어졌지만 어렸을 때는 한약을 자주 먹었다. 약한 불에 오래 달이는 한약, 어머니가 용하다는 한약방을 찾아가서 하얀 종이에 쌓인 약 꾸러미를 들고 오신 날은 표정이 비장하기까지 했다. 어머니는 검은 약탕기 앞에 앉아 바람을 지키며 무엇을 기도했을까. 18시간째 약을 달이고 있다. 약도 중국 마트에서 내가 직접 샀다. 어떻게 달여야 하는지도 검색했다. 모든 준비를 마쳤는데 약을 달일 수 있는 마땅한 도구가 없었다. Slow Cooker를 사는데 6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갱년기 아내를 대하는 나의 태도가 불량했기 때문이다. 아내를 논리적으로 설득하려고 했다. 그녀의 눈빛이 피고 지던 순간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감성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 한없이 불쌍하게 보여야 할 때가 있다. 나만의 슬로 라이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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