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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Sohn Feb 20. 2021

아빠 딸

가장의 무게

"응! 그래~ 아빠 딸~~"
언젠가부터 아빠는 내가 전화를 하면 이렇게 답하시며 반갑게 받으세요.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어느 날 곱씹어보니 말수 없으신 우리 아빠가 내게 하는 최고의 애정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랑스러운 나의 딸이라는 ᆢ


딸은 아빠하고 친할 수도 있지만 거리감이 생길 수도 있지요. 성별이 다르기에 생각이 다르고 게다가 권위적이고 엄한 분이시기에 어린 딸은 무서워 가까이하기  어려웠던 듯해요. 사춘기 시절에는 대화는커녕 혼날까 봐 피해 다니기에 바빴지요. 여동생은 아빠한테 애교도 많이 부렸지만 나는 철이 들면서는 언젠가부터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어요. 아빠가 싫어서가 아니라 트집 잡히기 싫었을 뿐인데 그렇게 굳어져 세월이 흘렀네요. 사실 나는 아빠가 좋았을 거예요.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 것 같아요. 어느 눈이 온 다음 날. 당시 우리 가족은 인사동의 한옥 집에 살았는데요. 참으로 인사동스러운 고즈넉한 집이었어요. 그날은 엄마가 안 계셔서 내가 아빠를 위해 상을 차려 마당을 지나 들고 가다가 밥상과 함께 미끄러졌어요. 마당에서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나니까 아빠가 동생과 같이 있다가 방문을 열고 마당을 보시더니 다친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문을 닫고 어린 동생과 다시 놀아주고 계셨던 듯해요. 어릴 때 기억이라 모든 것이 팩트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나는 아빠가 밖으로 나와서 괜찮냐 하고 같이 치워주시길 바랬기에 서운함만 남았던 것 같네요. 막내라서 사랑받는 귀요미 동생이 부럽고 괜히 서운하더라고요.


어느 날은 학교 친구 정선이집에 놀러 왔는데 나이에 비해 키도 크고 무척 성숙한 친구였어요. 아빠가 그 친구의 큰 키와 성장 속도에 대해 엄마와 얘기하시는데  애가 든든해 보인다고 부러워하시는  느껴져 나도 모르게 서운했던 듯 한 기억도 납니다. 그냥 무심코 한 얘기였을텐데 말이죠. 저는 그 친구만큼 든든해 보이지 못한 것 같아 자존감이 무너진 듯해요. 딸만 둘인 집에 장녀로 태어났지만 부모님을 지켜드릴 수 있는  강한 아들처럼 되고 싶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해 속상한 것 아니었나 싶기도 하네요. 지금 내  키가 163센티이니 50대 여자치곤  사실 작은 건 아닌데요^^~ ᆢ그렇게 어릴 때는 아무것도 아닌 걸로 서운해하기도 했어요. 


얼마 윤상현 씨가 슈퍼맨이 돌아왔다 라는 프로그램에서 두 딸과 퀴즈를  홍시 먹는 게임을 하는 장면을 보며 문득 옛 생각을 떠올립니다. 윤상현 씨는 두 딸 모두 이쁜데 아이들은 아빠가 자신만 바라보지 않는다고 각자 서운해하더군요. 울고 불고 관심 끌려 애쓰는 모습을 보며 나의 어릴 적 마음을 본 듯했어요. 상현 씨도 처음 해보는 아빠 역할이라  아이 모두에게 계속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게 쉽지는 않았겠다 싶네요. 아빠란 가장으로서 사실할 일이 많으니까요.


결혼 후 임신 중에는 유난히 심한 입덧 탓 괴로워서 친정을 가면 본의 아니게 인상을 쓰고 다녔지요. 그런 내 모습이 마음에 속상하셨던지 아빠께서 다른 임산부들은 잘 먹는데 왜 그렇게 웃지도 않느냐고 말씀하셔서 서운했어요. 사실 무척 바쁘신 중에도 우리 아들 제일 이뻐하시고 시간을 내어 매일 보러 오시곤 하셨어요. 하지만 내가 성인이 되어 대학생 일 때도 9시 이후 귀가한 날 앉혀놓고  심하게 혼내시곤 했어요.  다 큰 딸내미 걱정을 강하게 표현하시다 보니 소통은커녕 지금까지 구비구비 아빠에게 서운하던 마음 길만 지나오고 있었네요.


2020년 작년, 코로나 19로 병원 근처는 절대 안 갔어야 할 시기인데 오히려 우리 가족들은 유난히 병원을 자주 가야 했던 한 해였지요. 특히 2019년 말 내가 애틀랜타에 리더십 교육을 받고 귀국하자마자 아빠의 심장 수술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렇게 완고하고 강하신 분이 중환자실에 누워 계시는데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습니다. 결국 일을 그만두고 간호해드리며 철들고 처음으로 병원 모시고 다니면서 아빠와 대화할 시간도 가질 수 있었어요. 다행히 지금은 잘 회복되시고 있고 덕분에 시간 내어 함께 모시고 통원치료도 다니니 고마워하시네요. 당연한 일인데ᆢ 저에게 어느 날인가는 "딸! 아빠한테 해야  효도는 다했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작년에 "사람이 답이다" 책을 출판했을 때도 그 누구보다 자랑스러워 서점에 가서 직접 책도 사 오셔 주변에 선물도 하시고 행복해하셨지요.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라 그리고 소통의 기회가 없을만치 삶이  힘드셨겠지만 티도 안 내고 묵묵히 감수하며 살아오신 거예요. 딸에게 세세히 신경 쓸 여력도 없이  억센 세월을 살아내시느라 힘겨우셨지만, 이제 비로소 조금씩 서로 튜닝하며 이해하기 시작했지요. 딸은 요즈음 ᆢ아빠가 대학생 딸을 혼내시던 아빠의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리 완고하셨던지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병원을 오가 어느 날 신호대기  정차 중에,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뒤에서 우리 차를 들이받아 사고가 났어요. 아빠는 조수석에 앉는 걸 좋아하셔서 충격이 덜했는데 오른쪽 뒷좌석 쪽에 충격이 심하게 가해지며 폐차를 해야 할 정도였지요.  아빠랑 둘이 응급실에서 환자복 입고 검사받으며 나란히 병원 침대에 누워 대기했던 때가 떠오릅니다. 같이 링거 꽂고 몸도 아파 힘든 상황이지만 아빠와 함께 있어서 즐거웠어요. 나를 가장 사랑하는 분은 아빠인걸 알게 되었습니다.


팔순의 아빠도 `아빠의 엄마`를 보고 싶어 하신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군대 가는 아들 기차에 탄 모습 찾아보려고 발돋움하며  애쓰던 어머니의 안쓰러운 모습이 아직도 뇌리에 박혀 많이 그리우신 듯해요. 맛난 음식도 사드리고 싶은데 돌아가시고 안 계시니 너무 그립고 마음 아파하시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ᆢ


그동안 딸이 일만 하느라 너무 속없이 아빠의 사랑도 이해 못하고 많이 부족했어요. 아빠는 사랑이 없는 게 아니고 생각이 너무 깊은 분이시고 가장의 무게를 말없이 지고 오셨던 겁니다. 요즘 `가장의 무게`에 대해 생각이 많습니다. 나의 남편도 그리고 아들도 남자라면 걷게 될 그 길 ᆢ 꼭 뭔가를 많이 해서가 아니라 그 역할 자체의 무게는 감당하는 자만이 이해되는 자리니까요. 많이 힘드셨을 텐데 ᆢ


내가 대학생일 때 아빠와 등산을 함께 한 적이 있어요. 백운대가 그렇게 험한지 몰랐는데 아빠가 챙겨 오신 목장갑 끼고 기어이 정상까지 올라갔네요. 악바리같이 올라가던 내 모습을 기억하며 아빠는 지금도 흐뭇해하십니다. 초등학교 시절의 꼬마가 속 깊은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자랑스러워 하기 시작하셨죠. 낙엽이 수북이 깔린 곳을 디뎠다가 미끄러져 떨어질 뻔도 했지만 그때 함께 등산을 다녀오길 잘한 듯해요. 아빠는 `수산`이라는 호가 있으세요. 그리고 100개의 각기 다른 산을 등반하는 `수산 100 산 기념식`을 했는데 난 당시에 그것이 그렇게 대단한 것인지 모르고 제대로 축하도 못 해드렸어요.


 나의 첫 운전 연습은 삼십 년 전 아빠 차로 미사리 공터에서 시작했었지요. 딸이 운전을 배우겠다고 학원을 다니는 것을 보시더니 고민하시다가 인적 드문 곳을 찾아 연습시키러 데려가셨지요. 모든 게 잔소리이고  간섭처럼 느꼈던 철없는 딸은 아들을 낳고 비로소 같은 고민을 하곤 합니다. 이렇게 노심초사 키운 딸이 결혼하던 날 아빠는 밤잠을 못 주무시는 듯했어요. 결혼식 당일 나는 하루 종일 굶고 너무 분주해 아빠에게 따스한 말 한마디 못 드렸어요. 지금 같으면 그동안 잘 키워주셔 감사하다고 했을 텐데 ᆢ  얼마나 서운하셨을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결혼식 전날, 잠도 못 주무시고 눈물 흘리셨다고 들었어요ᆢ 


지금까지 나는 아빠한테 서운한 게 많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 알고 보니 제가 더 따습게 못했던 것 같아  죄송해요.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깨닫고 알게 되어 다행이에요ᆢ


올 구정에 세배 갈 때, 나의 딸내미 열 살이 된 마리를 데려가고 싶었는데 강아지를 별로 안 좋아하시는 줄 알고 안 데려갔거든요. 그런데 아빠는 오히려 봉투에 세뱃돈도 챙겨두셨더라고요. 딸이 좋아하는 강아지이니까 배려하신 것 같아요. 내가  강아지를 키운다 할 때 처음엔 싫어하시는 줄 알았지만 이내 알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 아빠가 키운 강아지들이 오래 못살고 죽어서 상처 입으셨던 듯해요. 딸도 마음 아플까 봐 정 주지 않길 바라신 듯도 하네요. 그래도 우리 마리가 짖지도 않고 순하고 얌전하니까 그리고 올해 수혈을 두 번이나 하면서도 잘 살아내고 기특하게 견뎌내어 가족으로 인정하신 듯해요.



아빠의 화단


아빠는 딸이 친정 올 때마다 웰컴 드링크를 챙겨 환영해 주세요. 말없이 잔에 담아 주시는 음료가 참 달게 느껴집니다. 그동안 아빠와 대화가 부족해 마음의 거리가 있었지만  글쓰기 모임 덕분에 다른 이들의 글을 읽다가 오늘 유난히 아빠 생각이 많이 들어 이 글을 적어 봅니다. 코로나 상황에 아빠의 팔순 생신 잔치도 외부에서 할 수 없어 얼마 집에 모시고 음식을 준비했는데 어찌나 행복해하시던지요ᆢ


생신 축하드려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건강한 모습으로 함께 해 주세요. 아빠 사랑합니다.  아빠의 딸이어서 자랑스럽습니다. 그리고 ᆢ 감사합니다.


정성을 담아 밀푀유나베를 준비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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