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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영 May 10. 2022

어느 더운 나라의 애독자 님에게




감히 내게도 애독자가 있다. 한을 가득 품고 글을 플랫폼에 적어왔는데 어느 날 "저 다 읽었어요" 하는 분이 나타났다. 그리고 "근데 제가 읽어도 돼요?"라고 물었다. 살짝 이불킥 지점이 있으나 이런 나라도 좋아해주는 분이니 괜찮겠지. 2015년 12월 31일, 나는 남편의 두 번째 사역지에 오다가 혼자 서점에 들러 성경을 샀다. 그리고 내게 주며 파이팅을 외쳤다. 성도라기엔 너무 사모요, 목회자라기엔 그냥 사모인 내게 펼쳐질 미래를 위하여. 그리고 몇 주 후, 새 신부라며 나보다 두 살 어린 사모가 왔다. 우리는 함께한 지 7년이 된 또래 사모, 그리고 어쩌다 독자와 한풀이 저자의 관계다.




실은 서로를 탐색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문과생 중에서도 답 없는 인간 군상을 더욱 답 없게 그린 소설을 즐겨 쓰던 문창과 출신이었고, 그녀는 모든 것을 수치화하고, 여전히 때로 동기들과 통계 낸 그래프를 카톡으로 주고받는 이과생, 과학도였기 때문이다. 내가 물이라면 그녀는 기름, 내가 N극이라면 S극인 그녀와 생각과 마음을 나누는 일은 늘 새로웠다. 예를 들면, 내가 시 읊듯 "사모로 사는 게 힘들잖아요?" 하고 운을 띄우면 그녀가 말했다. "근데 사모로 살아서 뭐가 힘드신 거예요?" 또, 내가 "마트에서 성도님들 마주쳐서 햇반을 못 사겠어요." 하면, "성도님도 제육볶음 사시던데요?" 하는 식으로 서로의 다름에 매료됐다.




나는 그녀를 지향한다. 그녀도 가끔은 나를 지향하겠지. 나는 굳이 느끼지 않아도 될 죄책감을 사모님에게 물으며 덜어냈다.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요?' 해주길 기대하며 미주알고주알 일러댔다. 반대로 사모님도 내게 물었다. 파악이 필요한 상황에 대해, 다소 예민한 성도에 관해서. 사모님을 알아가며 가장 좋았던 점은, 내가 사모이기 전에 하나님 앞에 '성도'라는 점을 인식했다는 거다.




첫 사역지에서 남편 부서 예배에 가지 못했다. 대형교회였고, 부서마다 담당 목사가 있었으며 남편은 전도사였다. 교회에서는 아무도 나를 몰랐다. 남편 따라 아침 7시 예배를 드리면 고작 한 시간 정도 후면 끝나는데, 남편은 그때부터 사역이 시작이니 나는 혼자 종일 교회 근처를 배회해야 했다. 새 가족 등록처도 생각했던 분위기는 아니었다. 두 눈을 마주치고 "잘 오셨어요" 할 줄 알았는데, 고개를 숙인 채 "저기 신청서 작성하세요" 하고 말했으니까. 유령처럼 떠도는 기분이 들어 남편 담당 부서에 한 번 갔다. 그리고 담당 목사로부터 이런 말을 전해 들었다. 사모님 다음 주부터 오지 말라고, 자기 아내도 오지 않는다고.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아, 나는 더 이상 교회의 일원이 아니구나, 사모구나. 스물여덟 청년이 아니구나, 사모구나.


그러니 남편과 성도가 요청하지 않는 자리엔 가지 않을 것. 되도록 주일에는 혼자 예배하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말할 것. 점점 교회를 회의적으로 여기는 나를 보고 남편은 지금 교회로 지원했다. 그리고 이곳은 대단히 정이 넘치는 곳이다. 반면 어르신이 많으니, 사모라면 어느 정도 조신해야 넉넉한 헤아림을 받는 것이 암묵적으로 동의되는 곳이기도 하다.




사모로 길러지는 과정은 나를 더욱 소극적으로 만들었다. 눈치력이 급격하게 상승해서 이젠 성도가 지나치며 내뱉는 숨소리만 들어도 '오늘자 기분'을 알 것 같다. 때로 이것이 당신을 잡아달라는 것인지, 모른 척해달라는 것인지까지 읽히기도 한다. 보통 정제된 단어를 사용하다가도, 때로 과감해야 좋아하는 성도 앞에서는 사랑 표현이 거침없다. 무엇보다 실수가 두려워 스스로를 검열하기 시작했다. 점점 나의 정체성은 성도 각각의 것이 되었다. 양 권사님 앞에서는 이런 나, 추 집사님 앞에서는 그런 나. 마음만 먹으면 교회 재적 인원만큼의 자아가 형성되는 거다.




그런데 나의 애독자 그녀는 달랐다. 어디서든 한결같았다. 사람이니 실수할  있고, 그래서 속상하면 화내거나   있는 사람이다. 대개 사모는 자신의 실수뿐 아니라 남편의 실수에도 고스란히 노출된다. 강단에서 또는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남편이 무너지면 사모 또한  수치감을 마주한다. 교회에서 남편 아내의 호칭, 사모로 있기 때문에, 남편이 가린들 성도가 먼저 말해주니까. 그래서 사모들은 보통 먼저 잘못했고, 먼저 미안하다. 그런데  사모는 조금 달랐다. 사모님이 부부 관계를 설명할  종종 '나는 , 너는 '라고 말할  속이 후련했다. 이럴 때도 있다. 권사님들이 자꾸 남편 셔츠 목덜미를 확인하고  옷을 사주실 , 나는 빨래 실력이 부족했나 싶어 부끄럽고 선물이 잦을수록 한숨이 난다. 그런데  사모님이 셔츠 선물을 받으면? 감사한 거다. 갑자기 식사 심방이 잡혔다? 한 끼가 해결되니 좋은 거다.




사모라고 교회의 모든 사역에 참여해야 하는 게 아니라 맡겨질 때 하면 됐다. 필요해 보이는 모든 구멍에 의무나 책임감에 찾아가는 게 아니라, 애초에 내게 정확히 맡겨진 것을 꾸준히 하면, 한정된 에너지를 쪼갤 때 오는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 '넌 왜 순전하게 하지 못해?' 하며 자책할 필요도 없다. 눈치를 보지 않으니 성도에 대해 오해하지 않는다. 오해하지 않으면 관계에 과하게 애쓰지 않고, 건강한 거리가 유지된다. 나처럼 지나치게 관계를 맺어 때로 그들의 분과 억울함을 분리하지 못할 일도 없다.




내가 이런 나라서 힘드니까, 상대적으로 건강한 사모님을 지향했다. 나에게 실망하여 토라진 성도도 하나님의 성도지만, 나도 성도다. 하나님은  곤란함도 아신다. 사모에게 씌워진 교회 성도 수만큼의 사모상은 실제 내가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를 아주 기가 막히고도 특별하게 지으셨을 걸. 이걸 아는  7년이 걸렸다. 그나마 애독자 사모님 덕분에 빨리 깨달은 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지난 7년간 많은 걸 공유했다. 먹어보고 맛있는 것, 가보고 좋은 곳 등 좋아하는 것들을 공유했다. 사모에게도 취향과 기호가 있다는 걸 서로 향유하며 '사모도 그래도 된다'고 안아줬다. 한때 품절 대란이 나던 과자는 먼저 발견한 사람이 꼭 사주며 찐애정을 확인하기도 했다. 서로 실을 나누며 뜨개질과 자수를 했다. 남편 때문에 모인 우리지만 남편과 별개로 이야길 했고, 실제로 남편과 관계없는 내 이야기를 할 때 위로받았다. 어차피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사모일리 없는 남편에게 이야기를 하는 때보다 때로 사모들에게 나누는 게 쉬울 일도 있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헤어졌다. 사모님이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고 잠깐 고개를 내밀어줘서 고마웠다. 교회 안에 유일하게 나를 귀엽다 해줘 자꾸 귀척하고 싶은 나를 두고 갔다. 아주 더운 나라로. 천국에서도 함께할 사이라 생각하면 이별에 씩씩해지다가도, 손 닿을 곳에 없는 지금이 사무치게 그립다. 내가 이 정도이니, 가족은 어떨까! 떠나보내던 식구들의 뒷모습이 너무도 작아 보여 돌아가며 안아드렸다.




비자 허락이 떨어지고, 출국 날짜가 가까워올수록 나는 초조했다. 친구를 보낼 때와는 또 다른 마음이 들었다. 좋은 뜻을 품고 나가는 가정에게 구질구질한 미련을 내보이는 게 폐가 될 것 같아 연락을 참았다. 대신 마음으로 안부를 물었다. 지금 진짜 괜찮냐고. 답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떠나는 마음은, 그냥 정신 없을 마음, 마음을 돌아볼 수 없는 마음. 그들이 새로운 곳을 향하는 동안, 나는 더 잘해주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추억 등 색색의 미련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가슴은 계속 뜨겁게 일렁이는데, 정작 해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출국 전까지 연락은 꾹 참고 그동안 함께 찍은 사진을 모았다. 공항에서 7년 치 사진 다발과 사모님이 좋아하는 쌀과자를 소분해 내민 나란 사람. 돈을 좀 환전해갈걸. 이런 나여도 늘 좋다고 연신 말해주던 사모님 덕분에, 나는 공공연하게 우울한 사모에서 가끔만 우울한 사모가 될 수 있었지. 또 빚진 마음부터 떠오른다. 할머니가 되어도 우린 셀카를 찍기로, 서로를 귀여워해 주기로 아직은 나 혼자 다짐한다.




5시간 걸린다고 했으니, 지금쯤이면 도착했을 거다. 더운 나라 숨 막히는 기운에 헛웃음이 나진 않았을까. 사모들이 사준 리넨 가디건을 입었다가 그마저도 더워 벗어야 할지도 몰라. 밥통이 아직 없다는데 맛집을 추천해줄까. 그 동네 찹쌀밥이 맛있는데. 아, 목욕탕 의자라 아기랑 앉아 먹기는 힘들겠지. 아니다, 맛이 아주 기가 막힌 타코 집이 있는데 너무 멀까?




남은 자는 여전히 떠난 자를 생각한다. 함께한 동네, 함께한 교회, 이 집에서. 나는 아마 내일도 별다방 소이라떼 한 잔 들고 골목을 걸으며 우리를 생생하게 기억할 거다. 집에 돌아와 거실에 앉으면 이 자리에 마주 앉았던 사모님이 생각나겠지, 지금처럼. 내 애독자 님도 골목골목 산책하며, 그 동네 시립 미술관과 잡화점이 좋다던 나를 가끔은 기억해주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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