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권사님이 되는 날이었다. 류권사 임직식에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아빠, 동생, 외삼촌 그리고 크리스천인 이모와 내가 참석했다. 사위는 목사인 터라 사진만 찍고 다시 집으로(교회로) 갔다. 숙모는 반려견 때문에 참석이 어렵다며 교회 입구까지 와서 류권사와 사진 한 장을 박았다.
나는 친정에서 불안한 책임감을 느낀다. 엄마와 나를 제외하고 교회를 다니지 않는, 아니 교회라면 학을 떼는 아빠와, 교회 다닐 적에 ‘누구의 동생’이라는 타이틀에 질렸을 동생 앞에서 방어태세를 갖춘다. 아무도 싸움을 걸지 않는데 갑자기 호흡을 가다듬거나 주변을 둘러보며 갑자기 스트레칭을 하며 이완한다. 그리고 이것은 꽤 헛짓이다. 언젠가부터 굳이 동생과 아빠는 교회에 대해 비난하지 않는다는 게 팩트다.
그런데 권사 취임은 좀 다르지 않은가. 아빠 입장에서는 아내가 어리석은 딸내미처럼 교회에 빠져 살다 못해 이젠 ‘교회가 밥 먹여주냐?’라는 본인의 십팔 번 멘트답게 직접 밥을 짓게 생겼으니. 동생 입장에서는 엄마가 누나 결혼식 때도 빌려 입던 한복을 곱게 사 입고, 그날따라 선녀처럼 나긋나긋하게 걸어 다니면 왠지 어색하지 않은가. 삼촌은 가족이 모두 기뻐할 일이라 하니 멀리서 일단 왔는데 설교뿐 아니라 권면, 축사, 기도, 공포, 공포패 증정 등 순서지만 A4 3쪽이니 놀랄 수밖에.
나는 얼굴 솜털 가닥가닥에 안테나를 세우며 주변을 살폈다. 생각해 보면 20년을 다닌 모교회에 갔으면 오랜 친구, 어른 들과 어울릴 법도 한데 사람들과 인사는 급하게, 가족들 눈치는 오지게 봤다. 다행히 사위 목사 안수식 때 주차장 근처에서 담배를 빠끔거리던 아빠는 오늘만은 그러지 않겠다는 듯 입술을 앙 다물고 자리에 앉아 있었고, 동생도 너그러운 성격답게 주변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과연 축제처럼 즐기고 있었다. 삼촌은 연신 휴대폰 카메라를 켰고, 이모는 강대상 위 스크린에 비친 류권사의 모습까지 일일이 카메라에 담았다. 그러다 고기 파티 밑작업을 하겠다며 집에 먼저 갔다.
신기하게 모든 게 잘 받쳐주는 하루였다. 설교 시간에 나온 “김제 조 씨, 성품 좋은 장로가 교회에 사랑방을 내준 이야기” 덕분에 동생과 아빠는 그런 좋은 사람이 우리와 같은 조 씨라는 것에 뿌듯해했다. 마지막 순서까지 너무 길 테니 집에 가도 좋다는 내 말에, 동생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기다리겠다”며 본당 뒤로 걸어가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기특하고 예쁜지. 오구오구. 역시 나 빼고 우리 가족은 모두 마음이 드넓어 만사가 형통할 사람들이었다. 남편과 교회에 오는 길에 “나는 늘 최악을 생각해. 그래서 기도했어”라고 말했는데 그 말은 혼자 취소했다.
옥상에서 고기를 구워 먹으려다 몸이 타들어갈 더위에 집에서 먹기로 했다. 이모는 이미 된장찌개를 구수하게 끓였고, 숙모는 고기를 썰고 있었다. 엄마는 크리스털 핀으로 고정한 머리와 화장은 그대로 하고 한복만 벗어던진 채 불을 지폈다. 치매 증상이 시작된 할머니가 걱정돼 자주 모이던 외가 식구들이었기에 고기 파티 준비는 막힘 없이 진행되었다. 와중에 할머니 혼자 “요즘 왜 자꾸 사람들이 집에 모이고 잔치를 여느냐” 의아해하며 귀찮아하기도, 좋아하기도 했다.
‘오늘 예배가 이상했다, 말이 너무 길었다’ 등 내 솜털이 기죽을 피드백은 하나도 없었다. 고기는 풍미가 좋았고, “류권사 이제 교회 일 하면 피곤해서 집안일도 못하지, 못해” 하는, 비기독교인이면 이해할 수 없을, 이모의 상투적인 농담도 다들 웃어넘겼다. 나만 아슬아슬했지, 휴. 그렇게 우리의 밤은 내 최악의 시나리오와는 무관하게 흘러갔다. 고기와 냉면과 된장찌개를 먹고, 약식과 떡으로 2차를 하고 반려견들을 귀여워하는 동안 할머니는 좀 지루한 눈치였다. 보청기가 아니면 잘 들리지 않는 할머니였다. 게다가 한 자세로 오래 앉아 있어 다리가 잘 움직이질 않아 화장실을 갈 땐 숙모가 부축했다. 끝내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이제 집에 가.”
엄마 집은 3층 할머니 집은 1층이었다. 그날따라 할머니는 운동화가 아닌 노란 스펀지 같은 가벼운 슬리퍼를 신었다. 슬리퍼를 신는 두 다리가 잘 움직이질 않아 문을 잡고 겨우 한 발 한 발 신었고, 나는 왠지 불안했다. 불길했다는 말이 더 적절한 것 같다. 그때 내가 따라나서야 했는데. 숙모는 목줄을 찬 반려견과 함께 내려가며 “어머님, 절 잡으세요.” 했다. 그리고 할머니는 당연히 “계단 난간 잡으면 돼”라고 했다, 우리 할머니는 우리 할머니여서. 이미 허리가 굽고 다리가 아파도 보조 기구나 지팡이를 보면 자존심이 상하니까. 할머니는 “또 봐” 하고 씩 웃으며 현관문을 나섰다.
잠시 후 다시 현관문이 열리고 할머니는 계단 한 칸 아래 앉아 있었다. 딱 한 칸을 디디고 주저앉았단다. 할머니는 식은땀을 흘리며 몸이 바들바들 흔들릴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 그런데도 옆에 앉은 동생 어깨에 기대지 않으셨다. 다리가 펴지지 않는다고, 아무래도 쥐가 난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누가 봐도 다리 모양은 골절된 뼈가 돌출된 모양이었다. 동생이 119에 신고하는 동안 곁에 내가 앉자 할머니는 말했다. “너는 들어가. 너는 여기 있지 말어.” 제발 손주들은 이만 들어가 주길 바라는 할머니였다.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뒤에서 할머니를 지켜봤다. 주말인지라 30분이나 지난 후에 119가 도착했다.
궁금했다. 아무리 인생에 ‘희비’가 교차한다지만 이렇게 단 하루에 희와 비가 공존한다고? 차라리 기대조차 하지 않던 ‘비비비’의 날들이 떠오르고, 그때가 낫지 않나 생각도 잠시 했다. 웃다가 우는 건 정말이지 굽이져서 견디기 힘들었다. 다른 가족들이 보기에 우리는 교회에 다니고, 신을 믿는데. 물론 당신들도 살아온 맷집으로 보아 ‘희희’는 바라지도 않지만 애초에 저 집엔 ‘비’가 왜 이렇게 많은지. 나는 괜찮은데, 아빠와 동생은 안 괜찮을 거 같았다. 가족들이 교회와 엮이고 싶지 않을 거 같아서, 나는 앓았다. 집에 남아 엄마 옆에 누워 위로하고 싶은데 다음날 교회에 가야 해서 울상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우니 고통스러워하던 할머니 모습이 아른거렸다.
고관절 아래 허벅지 뼈, 대퇴부 골절이었다. 90세 노인인 할머니 다리 수술은 잘 되었고, 마취 때문에 치매 증상은 더 심해졌다. 벽을 보고 웃으며 “이거 먹어봐라, 저거 먹어봐라” 하거나 옆에 누운 환자들이 집에 온 손님들이니 이모더러 자꾸 사과를 깎으라고 한다. 기억을 잃어가는 할머니 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대접해야 할 손님이었다. 이 사실에 할머니 90 평생이 안쓰러우면서도, 이모의 성화에 갑자기 “고마워.”라는 음성 메시지를 전해 오면 나를 기억하는 것 같아 안심하고, 이젠 정말 할머니의 기억이 온전한 때가 찰나인 것 같아 씁쓸하다.
신은 왜 우리 가정에 늘 '비'를 내리나 고민하는 동안 엄마는 예정대로 요양보호사 수업을 들어야 했다. 아빠와 동생도, 삼촌도 이모도 숙모도 속상하지만 일상을 살았다. 나도 사고 다음날 부서 아이들과 옥상에서 신나게 여름 수련회 포스터를 촬영했다. 오후에는 사모 모임도 있어 육아 중인 분들의 고충과 회사 고민 틈에서 친정 이야기도 최대한 담백하게 이야길 하며 기도해주길 부탁했다.
할머니도 지금 해야 할 것을 하고 씩씩하게 하며 지내고 있다. 기저귀를 아끼려고 소변을 참던 할머니는 간호사가 신장에 문제가 있는 줄 알고 소변줄을 달러 오니 “내가 쌀게” 하며 일을 보셨다. 이모가 잠든 새 다리에 고정해놓은 붕대를 푸셨다. 대공원에는 왜 가자고 해서 여기까지 와 있느냐고, 오늘 한양대병원 검진 날인데 어떡하느냐고 걱정했다(한양대 병원에 입원 중이심). 여전히 우리 할머니는 우리 할머니여서. 친척들과 할머니 소식을 주고받으며 마음은 아픈데 웃으며 지낸다.
왜 그날 희비가 한 끗 차이였는지, 왜 하필 교회로 모두를 불러 모은 날 할머니가 다치셨는지, 왜 저렇게 저 집에는 아픈 사람이 많고, 왜 목사인 남편은 집안의 대소사를 돌보지 못하는지, 여기에 왜 여전히 우리는 애도 없는지까지 연결되는, 지고지순하게 왜곡된 생각을 크게 반으로 접고, 한 번 더 접고, 두 번, 세 번 접어 던져 버렸다.
지금 알 수 없고 할 수 없는 일에 매몰되지 않으니 살 만하다. 늘 최악을 상상하니 비를 맞으면 좀 의연한 줄 착각하지만 실은 두 배 아니 세 배 불안하다 비까지 맞는 일을 왜 하나 싶다. 그러면서도 왠지 좋은 일을 말하면 사라질 것 같아 말할 수 없다는 교회 학생의 말에 격하게 공감하며. 나도 여전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