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희재 Aug 25. 2023

김밥

    일주일에 두 번은 점심 도시락으로 김이 들어간 음식을 싸간다. 김밥이 될 때도 주먹밥이 될 때도 있다. 그것을 학교에 가져갔을 때 나는 반드시 김이라는 음식에 대한 부연설명을 해야한다. 김(seaweed)은 단어에 대마초(weed)가 들어가는 탓에 설명하는 사람을 괜히 한 번 더 눈치보고 머쓱하게 만든다. 이런 저런 설명을 덧붙이기 귀찮은 마음도 올라오고 내 문화가 단박에 이해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눅들어 더 선명한 이미지에 부응하는 스시라고 대충 소개한다. 한 번은 여자친구가 있지만 MSN 메신저로 날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조이가 내 김밥을 하나 얻어가서 입에 넣자마자 눈치도 보지 않은 채 휴지통에 그걸 퉤 뱉었다. 그때 난 엄마가 싸준 음식, 내 출신, 예상하지 못 한 전개와 그 전개를 앞서 보지 못 한 자신이 부끄러웠고 동시에 조이를 향한 분노, 야속함, 원망을 느꼈다.

     이 학교에 영어를 제법 구사하는 여자 동양인이라곤 나를 포함해 두어 명뿐이다. 하지만 잘 나가는 무리에 속하고자 하는 열망을 내비치는 건 나 혼자인 듯하다. 스스로가 주제 넘는지 생각하면서도 나는 무리에서 나의 포지션을 신중하게 고민한다. 세계지리와 타국 문화에 한참 무지한 친구가 “동양인은 엄청 예쁜 줄 알았는데”라고 내 속을 긁는다 해도 난 영화 <미녀 삼총사>의 루시 리우가 되어 동양의 미를 보여주고 싶다. 자넷 잭슨의 ‘피드백(Feedback)’ 가사 속 ‘동양의 유혹(Asian persuasion)’은 날 두고 하는 말이 되게 만들고 싶다. 내게 편한 건 빨간 뿔 테 안경과 미키마우스 티셔츠지만 이 동네 조숙한 아이들의 문법을 따라 어반 아웃피터스에 가서 지나치게 펑퍼짐한 바지에 달라 붙는 상의 혹은 스키니진에 룰루레몬 집업 자켓을 사 입는다. 신발은 무조건 걸을 때 뒷꿈치가 헐떡이는 한 사이즈 큰 스케이트 신발. 머리에는 고무와 면으로 만든 헤드밴드. 거기에 형형 색색 민소매를 몇 겹씩 겹친 탓에 흡사 색칠놀이 끝의 얼룩말처럼 보이는 상하의 중간지대를 연출하면 가장 멋스러운 패션이 완성된다.

     내 인생 첫 스키니진을 산 날, 하루를 거울 앞에서 다 버렸다. 쪼그려 앉았다 일어났다, 앉아서 엉덩이 골을 확인하고 팬티를 추켜올리고 연신 내 다리가 이런 바지를 입기에 너무 굵다는 생각에 초 단위로 좌절하면서. 다른 애들 맵시도 이런 꼴이었던가? 내 다리는 꼭 엄마가 싸준 김밥 같다. 난 내 모습이 우스워서 참을 수가 없다. 허벅지를 쥐었다 놨다 하며 전 날 먹은 음식을 골똘히 생각한다. 스트레스가 쌓여 초콜릿 발린 쌀과자 한 봉지를 다 비운다. 그리고 위를 다시 게운다.

     다음날 여전히 꽉 끼어 불편한 스키니진을 입고 등교할 때 난 확신없는 상태로, 세상의 평가에 완벽히 노출됐다는 불안과 그 단상 위에 스스로 올라갔다는 후회에 휩싸였다. 무슨 생각으로 이걸 입고 하루를 보내겠다는 건지 그 멍청함이 용서가 되질 않는다. 어지러운 속을 어떻게든 상쇄하려는 생각으로 엄마의 블러셔와 마스카라를 훔쳐 쓰고 글리터 립글로스를 잔뜩 올린다. 학교에 가니 그다지 잘 나가지 않는 친구가 내게 말했다. “오늘 핫하네.” 그리고 조이는 내게 말했다. “화떡.”

     스키니 진을 입는 아이들은 가진 크든 작든 자신이 가진 섭식장애를 고백하는 것이 쿨한 일인 양 점심을 반도 먹지 않고 버린다. 그리고 샌드위치 하나를 홀랑 버리는 일은 최고로 멋진 행동이다. 그러니까 그건 마치 식사는 내 인생에서 가장 나중으로 중요한 일에 해당한다고 선보이는 것과 같다. 내겐 하루 섭취권장칼로리를 채우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인간관계, 나만의 문제, 비밀스런 사생활이 있다고. 이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점심시간이 되면 으레 배가 고프고 남은 오후 시간을 쫄쫄 굶으며 보내는 데에는 큰 배짱이 필요하니까. 그날 난 엄마가 정성껏 싸준 삼각김밥을 통째로 버렸다. 학교는 점심시간에 문을 닫기에 모두 하릴없이 콘크리트 바닥을 서성이거나 초록풀이 무성한 운동장으로 향한다. 점심을 버린 뒤 먹는 데 쓰는 시간을 벌면 우리는 교정을 거닐며 각자의 인기도를 지나가는 아는 사람과 인사하는 횟수로 견준다. 그냥 아는 애는 1 점. 이성친구가 있는 애는 2 점. 제일 잘 나가는 애는 5 점. 제일 잘 나가는 애와 포옹을 하거나 다섯 마디 이상 주고 받으면 추가 점수 3 점. 머릿 속 점수판이 시끄럽게 팔락인다. 모두가 알지만 나와는 친분이 없는 사람을 맞닥뜨리면 난 조용히 머리를 매만진다. 눈길 한 번이라도 받고 싶은 마음은 내비치지 않으려 더 애쓴다.

     집으로 돌아오니 오빠가 내가 삼각김밥을 버렸다고 은밀하게 말한 걸 엄마에게 고자질했다. 조이와 오빠의 머리를 한 데 놓고 진자 운동 추처럼 박치기하고 싶다. 내게 화를 내는 엄마 앞에서 난 입에 풀이 붙은듯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엄마에게 미안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던 나름의 이유가 있고 그걸 엄마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기에 침묵을 유지한다. 다음날 점심은 연어크림치즈 베이글이었던가. 나는 그것마저 피넛버터젤리 샌드위치, 요거트, 사과 따위가 반짝이는 채로 든 쓰레기통에 버렸다. 내가 버린 건 엄마에 대한 효심일까. 알량한 자존심일까. 희미한 자기확신일까. 깊고 끈덕이는 불안일까.

이전 02화 멀리, 더 멀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