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힌 공간에 있는 식물은 대부분 관상용, 공기청정용으로 인간의 입맛에 맞게 비치된다. 나 또한 가끔은 그런 식물들처럼 서구의 아시안 쿼터를 채우는 이름 잃은 장식 같다는 생각을 한다. 해외에 나오면 이름 석자 불릴 일이 거의 없다. 다들 발음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의도적으로 내 이름을 외면하기 때문이다. 로사 마리아, 크리스티안, 스베틀라나 같은 자음과 모음이 어지럽게 섞여있는 이름은 잘만 불린다. 희재라는 두 음절은 희줴이처럼 굴려지거나 에하처럼 가벼워지거나 아예 묵음으로 휘발돼서 침묵으로 사라진다.
올해 여름의 아흐레는 친구들과 독일 베를린에서 보냈다. 약 1년의 해외생활 중 처음으로 일주일 동안 또박또박 불리던 내 이름이 얼마나 소중하게 느껴지던지. 날 부르는 목소리는 그냥 파동이 아닌 온기 담긴 물결 같았다. 희재야. 희재는. 희재가. 나는 비로소 살아있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그 전엔 없는 사람이었던 것처럼. 투명해서 보이지 않는 사람인 동시에 너무나 눈에 띄는 아시안. 그렇게만 인식했던 내 존재에 불투명도가 올라간 기분에 고양됐다.
율리우스 폰 비스마르크의 2023년 작업 <나는 꽃이 좋아요 I like the flowers>를 베를린 여행 중 주립미술관에서 마주했다. 비스마르크의 작업은 동명의 동요에서 시작한다. “나는 꽃이 좋아요. 나는 수선화가 좋고요. 나는 산이 좋아요. 나는 들판도 좋지요. 불이 작게 일렁이는 난롯가도 좋아요.” 한 번쯤은 잎사귀나 꽃잎을 책사이에 끼워 말려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일상에서 자연을 손에 쥐는 낭만적인 순간이다. 자연의 낭만을 노래하는 동요나 우리 기억 속에 있을 법한 따뜻한 장면과 달리 작가는 인간이 자연을 통제할 때 느끼는 오싹함을 이야기한다.
비스마르크는 올려다 봐야 할 크기의 높은 잎을 바짝 말려 평면에 놓는다. 천장에 고요히 매달린 마른 잎 뒷편에는 차가운 철이 발려있다. 뿌리까지 생생하게 달린 이 식물들에게서 입체적인 생동감은 찾아볼 수 없다. 이파리는 본래의 색을 잃고 죽은 채로 매달려있다. 작가는 이 작업을 통해 서구의 폭력적인 생태 구분짓기를 고발한다. 전시된 식물은 모두 서구 밖에서만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이색적인” 식물들은 오늘날 우리의 집안이나 사무실을 장식한다.
비스마르크는 이 식물들의 이름에 주목한다. 서구에서 온 최초의 발견자를 통해 본래의 이름을 잃고 새롭게 이름 지어진 식물들. 고향을 떠나온 식물의 원래 이름을 우리는 모른다. 유행처럼 누구나 전시하는 몬스테라와 스투키는 알지만 들풀의 이름은 모르는 것처럼. 작가는 자연 안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서구의 권력을 조명한다. 내가 <나는 꽃이 좋아요>를 마주한 것 역시 당시 듣던 글쓰기 수업에서 식물원의 폭력성에 대해 배운 다음날이었다. 그날 나는 다같이 방문한 식물원을 온전히 즐길 수 없었다. 집을 떠나와 온실 속 인조적인 환경에서 가만히 스스로를 욱여넣은 식물들, 이름을 빼앗긴 식물들에서 내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기억하는 일은 중요하다. 내가 끝내 영어식 이름을 짓지 않고 자음보다 모음이 많아 혼란을 주는 한국어 이름을 고수하는 건 권력에 대한 식물처럼 조용한 나만의 저항이다. 몸이 움직여도 내 뿌리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굳은 의지. 나는 바싹 마른 채로 전시되지 않는다는 믿음. 소리없이 움직이는 생에 대한 갈망. 그러니 삶이 계속되도록,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