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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쭝이쭝이 Nov 03. 2024

한강 '채식주의자'

외설이 아닌 트라우마 얘기

어떤 작가의 작품을 여러 편 읽으면 그 작가의 생각들이 하나로 모이는 지점이 보인다.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상당히 논란이 된 작품인 '채식주의자'를 어제 다 읽었다.

내가 이해한 이 작품은 주인공 '영혜'가 많은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지만, 남편과 가족 등 누구도 그 트라우마를 제대로 보듬어 주지 않아 급격히 무너지는 과정에 대한 얘기다.

남편도 형부도 영혜를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상으로만 여겼고, 부모를 포함한 누구도 근본적으로 그녀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교정하려 들어 상황을 악화시킨다.

이 작품은 음란물도 외설로도 느껴지지 않았다. 삶의 누적된 트라우마를 가족이 더 덧나게 만든 한 여자가, 그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아무것도 파괴하지 않는 식물이 되길 원하는 얘기다.


이 작품을 읽으며 나는 내 가족과 아내에게 어떤 사람인가 생각해 봤다. 나는 가족과 아내에게 "왜 그래?"라고 질책만 하진 않았던가.


채식주의자를 다 읽고, 한강 작가의 시 '괜찮아'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한강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이 시에 그대로 녹아있단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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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 질 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같은 아이가 꺼져버릴까 봐


나는 두 팔로 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돌았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거짓말처럼


아이의 눈물이 그치진 않았지만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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