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가을이 눈에 들어왔다. 샛노란 나뭇잎이 점 지어 나무에서 나무로 그리고 거리로 이어지며,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은 마치 황금으로 만든 카펫을 깔아놓은 듯한 장엄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이내 온 세상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은행나무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노란 그늘 아래에서 저마다 각기 다른 옷을 입은 사람들이 지나가면 노란색과 또 다른 색이 오묘히 어울려 하나의 그림이 되어가는 그런 가을이 좋았다. 오드득거리는 은행나무의 열매나 푸석거리는 은행잎을 밟는 일은 가을의 정취를 한껏 느끼게 해 주었다. 신발에 묻어버린 은행열매는 닦아내지 않으면 몇 날 며칠을 따라다니는 가을의 향수가 되곤 했다. 이는 싸구려 향수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가을을 한 움큼 압축해 놓은 듯한 냄새였다. 이 냄새가 거리에서 사라질 즈음이면 한 해가 지나갔음을 알게 해주는 시간의 유의미함마저도 좋았다.
은행나무는 병해충으로부터 강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후부터 마음이 갔다. 최근에 무릎을 수술하고 온전히 걷지 못하는 삶과 평범하지 않은 하루들을 살아가다 보니 병충해에 강한 은행나무가 더욱 마음에 와닿았는지도 모르겠다. 강하다는 것은 잘 견뎌낸다는 말과 유사하다. 잘 견뎌낸다는 것은 이런저런 생채기가 여럿 생겼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는 과거로부터 이어진 생채기로부터 굴하지 않고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생겼다는 말이지도 모른다. 그래서 은행나무를 바라보면 웅장함과 장엄함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SNS에 최근 일상에 관한 이야기들을 기재하면 주변 사람들로부터 몸상태가 어떻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이렇게나 다들 나를 걱정해 주니 고마우면서도 괜스레 불편해졌다. 아프지 않았다면 '아픔'이라는 주제 대신에 다른 관심사로 이야기를 나눴을 텐데 하곤 말이다. 서로에게 공통된 관심사가 달라지는 것만 같아서 유감스럽다. 그랬기에 좋아지고 있다는 말로 화두를 전환시키는 것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 가끔은 정말로 좋아지고 있는지, 좋아지는 척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척을 하고 있으면 좋아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무너지기도 일쑤였다. 이 시기에 나는 무엇을 그리도 붙잡고 싶었는지, 그것이 날이 좋아서 떠다니는 수제비 모양을 한 구름이었는지 아니면 허기진 마음을 채우듯 먹어 치운 음식이었는지, 술을 들이킨 밤에 추슬렀던 마음마저 곤란하게 만든 취기였는지, 몽롱해진 상태에서 불현듯 떠올랐던 떨어지는 은행잎이 마치 나비와 같아서 훨훨 날아가는 꿈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아픔을 아는 사람이라면 아프지 않다는 일이 얼마나 축복인지 알 것이다. 이것이 마음에서 생긴 병이든 아니면 신체에서 발생한 병이든 한 번이라도 아파본 사람이라면 아픔이 보여주는 삶에 대해서 알게 된다. 아픔은 때론 우리에게 무기력함을 알게 해 주며, 꿈을 쫓다 희망을 꺾인 채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허망함과 좌절의 본질을 알게 해 주었다. 삶에 밑에서 마주한 진실은 아마도 희망이었기에 우리는 또다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바다의 깊이도 모르면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삶의 깊이를 헤아리려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결국에 시간이 지나야 만 알 수 있다는 명쾌한 답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러니 부디 내 안에서 나를 강하게 만들 줄 아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매 순간 나답게 보내는 시간에 감동했으면 한다. 그렇게 매일을 성실히 그리고 절실히 살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