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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드형 Mar 24. 2021

영어의 노예에서 해방되는 날

결국 메신저가 아니라 메시지였다

문법이나 발음이 뭐가 중요해?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순발력,

상대의 수준과 문화를 고려한 센스와 유머,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달하고자 하는 말의 내용이 중요하지.


<미나리>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가 된 윤여정 배우에 대한 기사를 보다 깨달았다. 난 지금껏 영어를 '메시지'가 아니라 '메신저'라고 생각해 왔다는 것을 말이다.


영어 공부는 학교 때부터 시작했던 것 같다.

자녀 교육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 요즘이야 영어 유치원부터 다닌다지만, 우리 땐 외국 영화나 드라마조차 자막보다는 더빙으로 보던 시절이라 국민학교(지금 초등학교)까지는 집에서 팝송을 듣는 게 전부였다.


TV보다는 라디오를 듣던, 워크맨이라는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가 막 등장하던 그때 팝송의 인기는 대단했다.

둘리스의 <원티드>, 놀란스의 <섹시 뮤직> 등의 노래를 가사의 뜻도 모른 채 들리는 대로 한글로 받아 적어 그냥 외우고 다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래서였을까?

중학교 영어수업 첫 시간에 내준 숙제가 교과서 문장 밑에 한글로 해석을 달아 오라는 것이었는데, 나를 포함한 학생들 대부분이 습관처럼 뜻이 아닌 발음을 소리 나는 대로 적어냈다.


그리고 영어시험은 단어의 암기와 문법의 이해 위주였다. "이 단어의 뜻은?", "유사어와 반대어는?", "문장에서 틀린 곳은?" 등등 많은 단어와 정확한 문법을 알면 영어 잘한단 소리를 듣던 그런 때였다.


그렇게 대입을 치르고 대학생이 되었다.

그 사이 한국은 서울 올림픽을 개최한 후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나라가 되었다. 영어도 Reading과 Listening이 중요한 '학문'에서  Writing과 Speaking이 중요한 '기술'이 되었다. 즉, 영어라는 도구를 사용해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상대방이 제대로 알아듣도록 하는 게 중요해진 것이다.



영어의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 살기


4월 영어 시험을 또 신청했다. 내가 다니는 직장은 S그룹 계열사로 매년 두 번의 OPIc 비용을 지원한다. 성적의 단계가 오를 때마다 상품권도 준다. 그리고 시험 준비를 위한 사내 강의도 운영하는 등 직원들의 영어 실력 향상을 위한 다양한 인센티브제가 있다.


OPIc은 나는 누구고 여가활동, 취미는 무엇이고 국내/외 여행은 어땠는지 등을 묻는 영어 인터뷰 중 하나다. 확한 단어와 완벽한 문법을 구사하느냐가 아니라, 던져진 질문에 얼마나 논리적이고 구체적으로 답을 하느냐를 테스트한다. 따라서 내가 하려는 얘기를 조리 있고 풍부하게 전달하기만 하면 고득점이 가능한 시험이다.


사실 시험 성적과 실제 영어 실력이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말하기는 단어와 문법보다는 순발력과 센스에 가까운 영역이다.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도 아는 비슷한 단어로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고, 시제나 단복수가 조금 틀려도 상대가 이해하는데 큰 지장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10년째 2등급(IH)에 머물고 있다.


살면서 참 다양한 영어 시험을 봐왔다. TOEFL, TOEIC, GMAT, OPIc... 점수가 나오는 시험이라면 그래도 자신 있던 나였지만 이것들은 아니었다. 시간과 노력, 그리고 돈 들인 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열심히 외우면 성적이 나왔던 다른 시험들과는 달랐다. '성문 종합 영어'에 익숙한 나로서는 이유를 몰라 답답하기만 했다.


그런데 몇 개 안 되는 단어들과 쉬운 문법을 가지고 전 세계 언론매체에서 당당히 영어로 인터뷰를 하는 그리고 그것이 제대로 전달되어 공감하고 웃게 만드는 한 노배우가 내게 가르쳐 주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내가 쓰고 싶은 글이 뭐지?"라는 고민보다는 "그 단어가 뭐였지?", " 문법이 틀렸나?" 하는데만 신경 쓰다 보니 지금껏 영어의 주인이 아닌 노예로 살고 있다는 것을.


단어와 문법은 메신저 역할을 하는 도구, 그저 그릇일 뿐이다. 중요한 건 콘텐츠, 정성이 담긴 음식일 것이다.


그것을 고 내용에 충실하다 보면

머지않아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 영어의 주인이 되리라.

그 해방의 날이 어서 빨리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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