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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드형 Oct 02. 2024

하동에 살어리랏다 1

징검다리 휴일이 시작되는 시월의 첫날

아내와 하동으로 여행을 떠났다.


올봄 벚을 보러 쌍계사 길에 왔을 때

가을에도 노랗게 변한 평사리 보러 꼭 오자던

약속을 잊지 않았.


충청도에서 태어났지

전라도와 경상도가 만나 지리산과 섬진강을 품은

그곳이 내겐 고향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https://brunch.co.kr/@jsbondkim/692




추석 연휴가 갓 지난 후라서 인지

아님, 날씨가 썩 좋지 않아서인지

고속도로는 한가롭고 시원하게 뚫렸다.


잔뜩 흐렸던 하늘이 남쪽으로 가면서

비를 뿌리기 시작한다.


아내와 번갈아 운전해 가며 4시간 여를 달리다 보니

어느새 남원 IC로 들어섰다.

구례 쪽으로 난 드라이브 코스는

벚꽃으로 화려했던 지난봄이 무색하게 적막했다.


화개장터에서 쌍계사 가는 길로 꺾어 들어가니

우리가 묵을 아원산방이 보였다.


내가 좋아한다고 근처의 드문 한옥을 열심히 검색해

아내가 픽한 찻집을 겸한 펜션이었는데

일본 여배우 키키키린을 닮은 은발의 여주인

환한 웃음으로 우릴 반갑게 맞아 주었다.


폐백음식을 하셨던 시어머니와 사업을 하겠다고

천평 부지의 산자락 4채나 되는 한옥을 지었는데

갑자기 중풍에 걸리시는 바람에

졸지에 시작한 숙박업이 벌써 15년이 넘었다며...


간이 딱 맞는 음식 같은

70대 여주인의 수다를 들으며

정성껏 우려낸 차 한잔 들이켜니

이번 숙소 운도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당을 둘러보던 아내가 갑자기 사라져 찾았더니

여기저기 떨어진 밤을 줍기 시작한다.

금세 한 사발을 채우고 나서도 더 욕심을 부리기에

늦은 점심을 먹자며 간신히 말렸다.


올 때마다 들린 단골식당으로 가는 길가에

일렬로 서있는 빨간 꽃무릇이 흐뭇하게 웃고 있다.


올여름이 하도 더워

가을 낙엽으로 한참 이쁠 들도 말라 떨어졌는데

그나마 너희들이라도 반기니 고맙다며

아내가 인사를 한다.



더덕구이 정식에 막거리 두어 사발을 걸친 후

얼큰한 기운에 근처 쌍계사로 산책을 갔다.


입구부터 시원한 계곡물소리 커진 기대가

한창 공사 중인  고즈넉함 없 아쉬웠는데

절 여기저기 제법 볼 만한 것들이 많았다.


특히 계곡 옆에

밥 짓는 여러 개의 무쇠솥이 나란히 올려진 아궁이집은

불멍쟁이 아내가 무척 탐내는 핫스팟이었다.



다시 비가 내리고

날도 어둑해지기 시작하면서

내일 일정을 위해 숙소로 일찍 돌아왔다.




아들에게 톡이 와 있었다.


엄마 아빠 간만에 단둘이 여행 다녀오라고

집에서 노견인 짱이를 봐주겠다며 큰소리를 치더니

국군의 날 행사를 한창 즐기는 중이란다.


분명 외로움 많은 짱이 잘 봐주겠다는 명목으로

엄마카드까지 받아두었다는데

여자친구를 불러

맛집도 가고 비행쇼도 봤다며 신나 하는 녀석.

(젊었을 때 아빠를 닮아 저리 철이 없는지...)


낮에 들른 청운식당 벽에

누군가 적어 놓은 <노년의 지혜>란 글이 생각났다.


언뜻 '다 내려놓으라'는 흔한 시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절대로 돈을 놓치지 말고

죽을 때까지 꼭 잡아야 한다는 현실적 조언이었다.



내일 아침은 기온이 뚝 떨어져

평사리의 노란 가을이 더 선명해질 것이다.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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