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겨울 이야기
겨울은 차가웠지만,
우리의 마음만은 언제나 따뜻했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가 어제와는 달랐다. 회색빛 하늘 아래 첫눈이 내렸다. 잠시 일을 멈추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뽀드득, 뽀드득. 새하얀 눈을 밟는 발자국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내가 아홉 살이던 겨울, 그해의 기억이 오래된 사진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동네 시냇가가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얼음이 단단하게 얼면 거울 같은 표면 위로 병뚜껑이 미끄러져 갔다. "야, 오늘은 내가 호날두다." 우렁찬 목소리에 삼삼오오 모여든 아이들이 두 팀으로 나뉘었다. 구멍가게에서 주워 온 플라스틱 뚜껑 하나가 우리의 하키 퍽이 되었고, 주변에서 찾은 나뭇가지는 스틱으로 변신했다.
목도리가 풀리고, 코끝이 시려질 때까지 우리는 그 작은 병뚜껑 하나에 온 열정을 쏟아부었다. 때로는 넘어져 무릎이 까지고, 옷이 젖어도 웃음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해 겨울, 특별히 기억나는 건 고모부와의 시간이다. "얼음 두께가 딱 좋구만." 고모부는 친척 중 유일하게 겨울 강에서 물고기를 잡는 분이었다. 망치로 얼음을 깨고, 긴 작살을 들고 기다리는 모습은 마치 전설 속 영웅 같았다. 시커먼 물속에서 번쩍이며 올라오는 금빛 물고기를 볼 때마다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거친 손등에서 느껴지던 온기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눈이 쏟아지던 날이면 우리 동네는 전쟁터로 변했다. 동네 형들어 힘찬 신호와 함께 시작된 눈싸움은 어머니의 등짝 스매쉬가 날아들 때까지 이어졌다. 허리춤까지 쌓아 올린 성벽은 우리에겐 철옹성이었고, 뭉쳐 던진 눈덩이는 날아가는 포탄이었다.
가장 아찔했던 건 겨울 바다로 가는 길이었다. 미끄러운 암석을 타고 옆 마을 친구들을 만나러 가던 그 비밀스러운 여정. "누구네 할머니한테 들키면 혼난다!" 서로를 부축하며 바위를 건너던 우리들. 파도 소리가 발밑에서 으르렁거려도, 그때의 우리는 두려움을 몰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의 두려움마저 달콤한 추억이 되었다. 물웅덩이가 얼어있는 논두렁길, 저녁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마을 안길까지.
첫눈이 내리면 그 시절이 떠오른다. 병뚜껑 하키의 함성, 고모부의 믿음직한 등짝, 눈싸움의 열기, 바다로 가는 아찔한 모험.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서 피어났던 그 따뜻한 이야기들이 내 마음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쉰다.
어쩌면 우리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저 하얀 눈이 녹아내리듯, 이 시간도 언젠가는 추억이 되리라는 것을. 하지만 그랬기에 더욱 뜨겁게 웃고, 더욱 크게 소리 지르며 겨울을 보냈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창밖에 쌓이는 눈을 보며 생각한다.
겨울은 차가웠지만,
우리의 마음만은 언제나 따뜻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