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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계절의 바다

by bluemind


바다에도 표정이 있다는 걸 3월의 해운대에서 알았다.

소음에 잠긴 표정이 있고, 고요에 젖은 표정이 있다.

사람들의 그림자에 가려진 표정이 있고,

햇살 아래 온전히 드러난 표정이 있다.


나는 그동안 해운대의 한 얼굴만 보고 살았다.

첫날은 무심했다. 비수기라 한적하겠거니,

그저 그런 여행이겠거니 싶었다.

유명한 곳은 이미 수없이 들춰진 앨범 같아서,

뒤적여봐도 새로울 게 없을 거라 여겼으니까.


봄이라는 계절이 해운대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도 있었다.

그러나 백사장에 발을 딛는 순간 알았다.

이곳이 내가 알던 해운대가 아니라는 걸.




파도의 소리가 있는 풍경

바다에서 가장 먼저 만난 것은 소리였다.

파도가 몸을 부서뜨리며 밀려왔다 물러가는 소리.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 소리를 그동안 왜 듣지 못했을까.


내가 아는 해운대의 소리는 사람들의 웃음이었고,

비명이었고, 떠들썩한 음악이었다.

여름의 해운대에는 바다의 소리가 없었다.

사람의 소리에 묻혀 숨을 죽인 바다였다.


아내가 손을 내밀어 내 팔을 잡았다.

모래 위에 발자국을 찍으며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바람이 코끝에 닿았다. 살짝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운 봄바람.

여름의 뜨겁고 습한 열기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모래가 발가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작은 알갱이들이 발바닥을, 발가락 틈을 간질였다.

여름에는 느끼지 못했다.

그때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내 감각이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어린 기억의 겹

해운대는 내게 어린 날의 기억이 쌓인 장소였다.

초등학교 시절, 할머니 댁이 있는 부산에 여름마다 내려갔다.

새벽같이 일어나 짐을 꾸리고,

일찍 자리를 잡기 위해 서둘렀던 기억.

파라솔 아래서 모래성을 쌓고,

튜브를 끼고 파도타기에 열중했던 시간.


그때는 북적임이 즐거움이었다.

많은 사람 속에 섞여 있는 것이 여행의 한 부분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여름이라는 계절이 데려온 기억이었다.


모래 위에 앉아서 저 멀리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선을 바라봤다.

수평선이라는 단어가 이토록 명확하게

눈에 들어온 적이 있었나.

여름에는 시선이 닿기도 전에

사람들과 파라솔에 가로막혔었는데.


"저기 봐, 유람선!" 아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다 위를 천천히 가로지르는 유람선 한 척.

이 광경도 여름에는 쉽게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색의 변주

햇살은 봄의 것이었다.

여름의 따갑고 강렬한 빛이 아니라,

은은하게 퍼지는 온화한 빛.

바다는 그 빛을 받아 여러 색조로 일렁였다.

가까운 곳은 투명한 에메랄드빛,

멀리는 깊은 남색으로 변하는 농담의 변화.


빛이 바뀌는 것을 지켜보는 일.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일정이었다.

해변 카페에 앉아 바다를 바라봤다.


커피 한 잔에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여행에서는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빛이 물 위에서 일으키는 파문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오후가 저물어갈 무렵,

해가 기울면서 바다는 점차 붉게 물들었다.

여름에는 저녁 8시가 넘어서야 지는 해가

봄에는 6시 무렵 수평선으로 내려앉았다.

그 순간의 색은 어떤 사진으로도 담아낼 수 없는 것이었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고,

그 시간 안에서 우리는 조금 더 가까워졌다.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아내의 옆모습이 유독 선명했다.

물결 위에 드리운 빛처럼 아내의 눈동자도 일렁이고 있었다.




빈자리의 의미

해변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우리는 이야기를 나눴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이 시간이 우리 부부에게 필요했다.

일상의 소음에서 벗어나 서로를 다시 바라보는 시간.


"사람들이 없으니까 바다가 더 크게 느껴져."

아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드문드문 걷는 사람들 사이로 바다는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빈자리는 때로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의 북적임이 채울 수 없었던 무언가를

봄의 여유로움이 채우고 있었다.


"내년에도 이맘때 오자." 아내가 말했다.

그랬다. 우리에겐 이제 또 다른 해운대의 기억이 생겼다.


여름의 활기찬 바다와 봄의 고요한 바다.

같은 장소, 다른 시간.




깨끗한 기쁨에는 소리가 난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

어제의 풍경과 오늘의 풍경은 같을 수 없다.

내일의 해운대도 오늘과는 다를 것이다.

계절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고, 빛이 바뀌니까.


손을 뻗어 손을 잡았다.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 이것도 깨끗한 기쁨이었다.

소란스러운 여름의 기쁨 대신, 고요한 봄의 기쁨.


깨끗한 기쁨에는 소리가 난다.

참을 수 없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웃음은 손뼉 같은 것. 짝! 마주 부딪쳐야만 소리가 났다.


오목한 손바닥을 활짝 펼치고서

움직여볼 때야 일어나는 소리처럼,

동그란 곡선을 활짝 그려본다.

그걸 보고 마주 웃어주는 것.


일상에 지친 우리에게 봄날의 해운대는

깨끗한 기쁨을 선물했다.

나는 '바다의 표정'이라고 이름 짓고,

폴더를 열어 넣어두었다.


스포트라이트 아래 비켜서서

어둑한 구석에 머무는 순간이야말로 귀하다는 걸.


나는 이제 그런 걸 아는 나이가 되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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