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는 하얗게 서리가 내린 과수원을 거닐고 있다.
이젠 과수원에는 새들도 날아오지 않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매달아 둔 깡통 소리만 ‘덜컹덜컹’ 간간이 날 뿐 과수원은 너무나 적막했다. 수확한 사과는 소화의 손에서 벗어나서 저장 창고로 옮겨졌다. 그래서 과수원에 와도 할 일이 없어진 소화는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과수원 안을 돌아다녔다. 차분차분하게 걷고 있던 소화는 언덕배기에 있는 ‘난쟁이들의 사과나무’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그 나무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소화는 속상하거나 힘든 일이 생기면 이 사과나무에 와서 자신의 속마음을 다 꺼내 놓았었다. 누구한테도 할 수 없는 말을 마음껏 하고 나면 다시 용기가 생겨서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안녕! 이젠 겨울이니깐 푹 쉬어. 그래야 내년 봄에 또 이쁜 꽃을 피우겠지. 그럼 또 맛있는 사과가 열릴 거야. 난 세상에서 네 사과가 제일 맛있거든.”
소화는 한참이나 사과나무에 머물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반대편 과수원을 통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저녁 식사 후 파과를 한 바가지 담아왔다. 그리고 흠집이 나거나 썩은 부위를 도려내면서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썩은 곳을 도려내니 생각보다 먹을 게 많네.”
엄마는 혼잣말하면서 연신 사과를 깎았다. 아빠는 엄마가 깎아 놓은 사과를 먹으면서 TV를 보고 있다. 아빠가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인 것을 알기에 누구도 아빠를 건드리지 않았다. 쌍둥이 오빠는 접시에 담긴 사과에 눈길 한번 안 주더니 일어나서 자기 방으로 ‘휙’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본 엄마는 재빨리 창고에 가서 크고 먹음직스러운 사과를 2개 가지고 와서 열심히 깎았다. 그리고 사과를 먹고 있는 소화에게 깎은 사과가 든 접시를 내밀었다.
“얼른 오빠한테 가져다주고 오거라.”
“싫어요.”
“싫다고?”
“다른 것은 몰라도 오빠 심부름은 안 한다고 말했잖아요. 오빠한테 가져다 먹으라고 하세요. 그리고 나도 좋은 사과 먹고 싶은데 왜 오빠한테만 줘요?”
“너는 지금 먹고 있잖아.”
“이 사과처럼 흠집 난 것 말고요.”
“오빠는 힘들게 공부하고 있잖아.”
“사과하고 공부가 무슨 상관인데요? 그리고 지금 밥 먹고 갔으니깐 아랫목에서 뒹굴뒹굴하며 만화책이나 읽고 있겠죠.”
“너는 어차피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니깐 가져다줄 수도 있잖아?”
“그래도 안 할 거예요. 그리고 나도 파과는 더 이상 먹기 싫어요.”
소화는 먹던 사과를 접시에 내려놓았다.
“아이고! 철딱서니가 없는 것 같으니라고. 너까지 좋은 사과를 먹으면 우리는 대체 뭘 먹고 사니?”
“그러면 좋은 사과를 오빠하고 반반씩 나눠서 주면 되잖아요?”
“이것도 없어서 못 먹는 집들이 많은데 호강에 겨워서 별소리 다 한다.”
“다른 집들과 비교하면 안 되죠. 우리 집처럼 과수원을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오늘따라 뭔 말이 이렇게 많아? 꼬박꼬박 말대꾸하고 있네.”
“나한테도 어쩌다가 좋은 사과를 줄 수도 있잖아요. 맨날 오빠한테만 좋은 사과를 주고 나한테는 파과만 먹으라고 하잖아요. 엄마는 내가 좋은 사과를 먹는 게 그렇게 아까워요?”
소화는 가슴 깊은 곳에 있는 말을 꺼내서 엄마에게 던지듯 말하고 빠르게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자신의 방으로 가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소화는 아무도 없는 낯선 방에 혼자 있었다. 천천히 둘러보니 온통 하얀 방 안에 화려한 화장대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자개로 된 화장대는 너무나 화려해서 멀리서 바라봐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소화는 호기심이 생겨서 조심스럽게 화장대 쪽으로 걸어갔다. 어디서 봤는지 화장대가 익숙하다고 생각하면서 천천히 다가가 보니 화장대에 앉아있는 사람이 보였다. 그 사람은 거울을 보면서 무언가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소화가 좀 더 가까이 가니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들렸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이쁘니?’
그 사람은 자개로 만든 화려한 화장대와 어울리지 않게 낡은 티셔츠와 몸빼 바지를 입고 있었다. 뽀글뽀글한 파마머리와 옷차림이 낯이 익다고 생각한 소화는 조심스럽게 그 사람한테 가까이 다가갔다. 소화가 화장대 근처 가까이 갔을 때 그 사람의 얼굴이 거울에 비쳤다. 소화가 거울에 비친 그 사람을 바라보자 거울을 보고 있던 그 사람이 ‘휙’ 돌아섰다. 갑자기 돌아선 그 사람을 보고 소화는 그만 발걸음을 멈췄다.
그 사람은 바로 엄마였다. 엄마는 거울을 보면서 웃던 표정과 달리 소화를 보자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 평상시 엄마가 소화를 보면 짓던 표정이었다. 엄마는 일어나서 한 걸음씩 소화에게 다가왔다. 소화는 너무 놀라서 그 자리에서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도망치고 싶은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서 발버둥을 치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뜬 소화는 재빨리 일어나서 전구 스위치를 켰다. ‘쨍’하고 방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소화는 천천히 숨을 쉬면서 마음을 안정시켰다. 꿈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소화는 아주 깊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소화는 깜깜한 밤이 무섭다. 어두우면 블랙홀로 한없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또한 컨디션이 안 좋거나 궂은 날씨이면 불을 켜야 잠을 잘 수 있었다. 특히 날씨가 사나운 밤이면 더 무서웠다. 소화의 집은 한옥이라서 바람이 불면 문들이 덜컹거렸고 비가 오면 빗물 떨어지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렸기 때문이다. 한밤중에 들리는 야생 고양이의 울음소리는 무엇보다도 공포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이런 날이면 불을 켜야만 잠을 잘 수가 있었다. 그러면 영락없이 엄마가 들어와서 불을 끄고 나갔다. 문을 여닫는 소리에 잠이 깬 소화는 무서워서 다시 불을 켰다. 그러면 엄마가 전기세 많이 나온다고 다시 불을 끄고 나갔다.
어쩔 수 없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빨리 잠을 자려고 눈을 감아 보지만 갈수록 정신이 또렷해져서 무서운 생각만 더 들었다. 뒤집어쓴 이불로 인해 땀이 비 오듯이 줄줄 흘렀다. 덥고 답답해져서 숨이 막혀왔다. 참다못해 이불을 젖히면 시원해서 좋긴 한데 이번에는 걸려있는 옷이 귀신으로 보여서 무서웠다. 낮에는 필요해서 입고 다녔던 옷이 밤이면 신경이 쓰여서 잠을 못 자는 것이 아이러니하다고 소화는 생각했다. 이런 날이면 새벽녘에서야 겨우 잠이 들어서 늦잠을 자곤 했다. 그러면 늦잠을 잤다고 엄마한테 또 혼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