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결혼식을 막 준비할 때다.
“엄마! "
아들이 평일 대낮에 전화를 하는 일이 거의 없는데 전화가 왔다. 아들은 낮시간에 주로 대학원 연구실과 실험실에 있는데, 그곳은 외부 소리가 완전히 차단된 곳이어서 온전히 연구와 실험에 집중하는 공간이다. 그 사정을 알다 보니 급하게 물어볼 일도 연락하지 않고 문자를 남기면 나중에 연락이 오는 편이다. 그러니 아들이 주중 한낮에 전화를 해 온 것은 다급한 일이 생겼다는 것이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래서 걱정스레 전화를 받았다.
“엄마! 마일리지 있어요?”
“어? 무슨 마일리지?”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뭐 어디든요!”
“글쎄, 모르겠네. 코로나에 통 나가질 않아서… 있는지 없는지도 몰라…”
예전만 해도 지방이며 전국으로 특강을 다녀서 늘 항공사 VIP였다. 그런데, 일을 그만두고 늦으막에 아들 뒷바라지 하다 보니 여행은 내게 사치인 시절이 있었다. 아마도 그렇게 집순이가 된 것 같다. 게다가 이래저래 내가 돈을 벌지 않으니 여유가 없었고, ‘나중에 여유자금이 모이면 가야지’ 했지만 살다 보면 그 돈이란 게 넉넉한(?) 날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어쩌다 돈이 생긴다 싶으면 꼭 그 돈이 나갈 일이 생겼다.
더구나 코로나로 인해서 해외여행에는 더 소극적으로 변한 것도 있었다. 그 이유로 우리 부부는 어쩌다 코에 바람이 쐬고 싶으면 직접 자동차로 갈 수 있는 여행지를 선택하기 시작했다. 가령, 속초 막국수가 먹고 싶어서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오기도 하고 벚꽃구경은 경주 보문단지로 여행을 다니곤 한다. 그러니까 내 손으로 운전 가능하고 바로 내려서 내 발로 땅을 밟고 걸을 수 있는 여행이 이제는 더 익숙해졌다. 이러니 우스갯소리로 비행기가 높이 날고 길게 생겼다는 것만 기억할 뿐 요새 인천국제공항은커녕 김포공항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런 나에게 아들이 내 항공사 마일리지가 얼마나 있는지 묻는 것이다.
“뭣에 쓰려고? “
“아, 신혼여행 갈 때 엄마, 아버지 꺼 마일리지 제가 좀 쓰려고요!”
그렇게 아들은 내 마일리지로 신혼여행 항공권을 예약했다.
“엄마! 여행 안 간지 오래됐는데, 마일리지가 왜 이리 많아요? 얼른 써야겠어요!”
‘아! 이 자식은 내가 저를 위해서 산 세월이 얼만데, 내 인생 마일리지도 가져가고 이제는 항공 마일리지조차 다 가져가네!’
몇 년 전 일이다. 친정엄마가 무릎수술을 받게 되었다. 그로부터 몇 해 전에도 의사와 가족들이 수술을 권유했지만 엄마의 강력한 거부로 인해서 시간을 많이 끌게 되었다. 한 번은 일본 벚꽃구경을 시켜드리려고 엄마와 여동생 그리고 우리 부부가 함께 패키지여행을 갔었다. 그런데, 여행을 다니면서 70대인 엄마는 앉을 때나 일어설 때 여동생의 부축을 받았고 앉을자리만 있으면 무릎이 아프다며 쉬는 것이었다. 구경은 뒷전이었다. 일행 중에는 엄마보다 열 살이나 더 많은 80대 노인이 있었는데 너무나 정정해서 나이가 무색할 만큼 정말 팔팔하게 날아다니는 것이었다. 그 일로 엄마가 충격을 받고 그동안 버텨오던 수술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막상 수술 날짜가 잡히고 수술을 하기 위해서 우리 집에 와서는 불안해하는 것이었다.
“엄마! 내가 잘 알고 친한 의사이고 또 무릎수술 전문가니까 걱정 안 해도 된데이“
“아이다. 뭔 걱정이고…“
“근데 와 얼굴색이 안 좋노!”
“내 혼자된 지 30년 아니가. 너그 아부지가 살아 있었으모… 내도 수술이 처음이라 무섭데이. 이럴 때 너그 아부지가 내 옆에 있었어모… 그라모 싶어서 그러제!”
그때, 엄마가 엄마가 아닌 순전한 여자로 보였다. 내가 어릴 때 보았던 그 여자, 우리 엄마! 엄마는 항상 벨벳드레스 또는 허리벨트가 꼭 잠긴 플리츠 원피스를 입고서 양산을 쓰고 아버지를 따라다녔다. 동네 안에서도 둘이 늘 붙어 다닌다고 금슬 좋기로 소문난 부부였다. 그 당시는 남편이 아내를 너무 달고 다니면 손가락질하거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는데, 아버지는 엄마를 너무 이뻐해서 외출을 하거나 일을 나갈 때도 할 수만 있으면 매번 같이 다녔다. 그래서 이 모습을 가장 보기 싫어하면서 마치 눈엣가시처럼 바라본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우리 할머니였다.
“문디, 너그매(너희 엄마)는 나한테 배우라는 살림은 안 배우고 맨날 너 가배(너희 아빠) 따라서 쏘다닌다!”
나는 할머니가 이렇게 엄마 흉을 보는 말을 종종 듣곤 했다. 그때는 할머니 말이 다 맞아 보였다. 태어나면서부터 나는 할머니 방에서 할머니를 부둥켜안고 잤고 산이며 들이며 산나물을 뜯고 산꽃을 따서 요리를 하며 살림살이의 기초수업을 할머니에게서 배웠다. 또, 할머니가 도시에 사는 딸 집에 가도 나만 데려갔고 결혼식이든 초상집이든 어디를 가든지 할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따라다녔기 때문에 그런 할머니가 내게 하는 말은 다 진리였다. 한마디로 나는 할머니 맹신자였다.
나중에 내가 시집을 가서 엄마를 다시 제대로(?) 바라보면서 할머니가 엄마에게 시어머니였다는 것을 깨달았을 정도였다. 그러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이후 6개월 만에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사업에 여러 번 도전하다 많은 빚을 남긴 채로 말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 일은 참 아이러니한 것 같다. 할머니가 내 엄마 그러니까 며느리가 하는 게 마음에 안 든 때가 참 많았겠지만 지금 우리 친정집이 이만큼 지탱하고 지금까지 온전히 유지된 것은 순전히 엄마 덕분이라는 것이다. 만약에 엄마가 할머니가 눈을 못 감고 떠나실 정도로 가슴 아파한 큰아들을 돌보지 않았다면, 우리 4남매를 돌보지 않았다면, 이 집을 지키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엄마는 할머니의 큰아들인 평생 앞을 못 보는 장애를 가진 시아주버님을 죽을 때까지 모셨고 우리 4남매를 밥 안 굶기며 당당하게 키워내셨고 지금도 그렇게 애써서 키운 자식들에게 용돈 안 받으려고 시금치와 마늘 농사를 지으며 용돈을 벌고 계시니!
이렇게 살아온 엄마가 언젠가 했던 말이다.
”내가 너그 아부지 빚을 안고 너그들, (4남매) 내 새끼들 키울 때는 눈에 아무것도 안보이더라! "
“너그 동생들 등록금을 내모 금방 6개월이 돌아오는 기라! 내 쪼매만 더 일할라고 일어서지도 않고 무릎을 질질 끌어가며 농사를 지었던 기라!”
그렇게 엄마의 두 무릎은 연골이 다 녹아내리고 무릎에 고인 물을 빼내고 뼈가 부닥쳐 닳아지도록 일해서 자식 넷을 일으켜 세운 것이었다. 홀로 된 30년 내내 그 세월 동안 쌓은 엄마의 두 무릎이 쌓은 인생마일리지 덕분에 친정집이 지금껏 건재하고 그렇게 우리들이 이만큼 살게 된 것이다. 그렇게 사느라고 돌보지 못한 엄마 다리는 이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할 만큼 오그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런 엄마 무릎을 보고 의사가 한 말, 그 한마디에 엄마가 서럽게 울었다.
“어머니! 어머니 무릎을 보니 어머니 인생이 보입니다!”
“엄마 엄마!”
“왜?”
아들이 결혼하고 2주일쯤 지났을 때다. 아들이 퇴근하면서 전화를 했다. 평소 서울말(?)을 쓰는데 경상도 사투리로 변장을 한 채 말이다. 아들이 사투리를 쓸 때는 좀 무섭다. 특별히 부탁할 게 있다는 뜻이라서 내가 안 바쁜데도 좀 바쁜 척 또는 신경 쓸 일이 있는 척! 긴장하면서 받아야 했다. 참 희한한 게도 아들이 평소와 달리 경상도 사투리로 말하면 엄청나게 불쌍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때는 내가 거절을 잘 못하기 때문에 아들을 매우 조심해야 한다.
“엄마, 반찬 좀 주래이!“
“뭐라카노! 이제 장민이 해주는 거 묵고 사돈이 주면 좀 얻어먹고!”
“안… 준… 다…!”
“뭐?!”
일단 끊었다. 그렇지만 생각이 많아졌다. 보통 딸이 시집을 가면 음식솜씨가 없을 때라서 친정에서 반찬가지를 챙겨주기 마련인데, ‘안 준다’고 하니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 말을 듣고서 반찬을 안 줄 수도 없고, 만들어 주자니 며느리가 (속으로) 싫어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건 내가 전혀 예상 못한 일이었다. 남들이 말해준 대로 며느리가 시집온 게 아니라 아들이 처갓집으로 장가를 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더욱 그랬다.
왜냐하면 내 경우만 해도 그렇다. 나는 신혼 때도 할머니와 엄마로부터 요리를 배웠기 때문에 밑반찬 정도는 만들 수 있었다. 그래도 엄마가 늘 먹을 게 있으면 챙겨주고 도와주었다. 무엇보다 내가 쉬는 날, 일하는 딸이 음식 만드느라 쉬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엄마는 반찬을 만들 때 내 것까지 넉넉히 만들어 가져다주곤 했다. 나는 그랬는데…
“그럼, 장민이가 반찬 안 해 주니?”
“어제 오뎅 볶아주고 오늘도 또… 오뎅인 것 같더라”
‘아! 당연히 그렇게 먹고사는 거지! 처음엔 누구나 오뎅만 가지고 오뎅볶음, 오뎅국, 오뎅탕, 오뎅조림, 오뎅전 그렇게 네댓 가지 반찬을 하며 먹는 거지 ' 싶었지만 그간 엄마 손맛에 길들여진 아들이 알리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도시락 반찬 하나에 그동안 쌓였던 게 한꺼번에 생각이 났다. 제아무리 참고 참으며 살아도 언젠가 터지는? 지랄(?) 총량의 법칙이 있다고 하더니 내가 바로 그때였다. 물론, 아들이 듣지 못하게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마음으로 크게 소리쳤다.
‘아, 이 짜식이… 매일매일 도시락 4년. 대학원 2년. 이제 박사과정… 여태 내가 5첩, 7첩 반상 도시락을 해다 바쳤는데!‘
‘장가가면 그동안 징글징글한 도시락 반찬은 그만이지! 이제는 며느리 반찬까지 해 달라고?’
‘그래, 내가 다 해서 결혼시켜 놨더니. 이제는 반찬? 아예 내 등골을 다 빼먹어라! “
그렇게 마음속으로 소리쳤어도 결과는 뻔했다. 나는 며칠 후 바리바리 반찬을 해서 학교에 갖다 주었다. 그랬더니 아들이 하는 말, 10첩 반찬이 고맙다는 말은 안 하고 한다는 말이.
“엄마, 안 본 새 와 이리 늙었노! 글이 안 보인다고 자꾸 인상 찌푸리지 마라. 주름 된다! "
그 말에 기분이 상해서 아들과 헤어지면서 아들 등 뒤에 대고 이렇게 또!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에라이! 야 이 나뿐 짜식아! 이 주름 다 니 덕이다. 이게 니한테 바친 내 인생 나이테다. 야 이 짜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