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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 May 21. 2022

당근 싹이 났다.

애들보다 당신이 더 좋아하는 것 같은데?

어제 베란다에 나가 페튜니아(나팔꽃) 화분에서 시들어버린 꽃들은 떼어주고 있으니

우리 남편이 나에게 한 말이다.


"애들보다 당신이 더 신기해하고 좋아하는 거 같은데?"


아직까지도 잔디밭에 들어가려면 심호흡을 해야 하고 친정집에 엄마가 가꾸시는

화단만 봐도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내가 조금씩 변한 건 사실이다.


https://brunch.co.kr/@jsmbja/550

우연히 커피를 샀다가 만난 바질씨앗과 커피 화분, 그리고 때맞춰 선물 받은 패튜니아(나팔꽃)까지

아이들에게 생명의 소중함과 물을 주며 키우는 기쁨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 과감히, 정말 과감히 베란다에

자리를 내주었는데 어느새 내가 이 아이들의 매력에 조금씩 조금씩 빠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란 말처럼 왠지 나에게 이참에 자연과 친해 자리는 것처럼

당근 씨앗과 란타난을 선물로 받게 되었다. 정말 선물로 받은 건 아니고(?) - 왜냐하면 내 주변인이라면 내가 환경은 위하지만 자연과는 안 가깝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 당근 씨앗은 같은 학교에 텃밭 담당 선생님이

다 심고 나서 씨앗이 조금 남았다며 애들이랑 키워보라고 주신 거고 란타난은 스승의 날 기념으로 전 교직원에게 하나씩 나눠주신 것이다.


그래서 일이 커졌다. 우리 집에 무려 화분이 다섯 개나 된 것이다.


우리 집에 자연이란 이름으로 첫 발을 들인 바질씨앗. 나에게 생명의 신비로움을 제대로 느껴지게 해진 이 녀석은 어느새 쑥쑥 자라 잎사귀가 처음 싹의 3-4배까지 컸다. 더더욱 신기했던 건 커진 싹들 안에서 또 다른 새싹들이 피어오를 준비를 한다는 것이다. 기특한 녀석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사진에 보다시피 화분 안쪽 테두리에 하얀 것들이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왠지 곰팡이 같아서 다 긁어내야 하나.. 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옆에서 보던 남편이 곰팡이 아닌 것 같다고 해서 일단 지켜보는 중이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곰팡이 같다. 허연 것이 점점 번지는 것이 색깔도 점점 푸르뎅뎅해지고. 물을 너무 많이 준 걸까? 하루에 한 번 듬뿍 줬을 뿐인데. 아니면 화분 자체가 커피 화분이어서 음식 소재라 어쩔 수 없는 현상인 건지. 화분 전문가가 있으면 한번 물어보고 싶다.


그리고 우리 집에 새로 터를 잡은 당근 씨앗들. 선생님이 씨앗을 주시며 당근이라고 말했을 때부터 "당근이 씨앗으로 심는 거예요?"하고 놀랐는데, 그 뒤에 이어진 말이 더 놀라웠다. 발아율이 엄청 낮다는 것. 그래서 한 움큼 뿌려도 절반이 싹이 나올까 말까 한다는 것이다. "그럼 저는 못 키우겠네요 하하"라고 했더니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차피 화분도 작다고 했으니까 잔뜩 뿌려놓고 기다려보세요. 절반은 싹이 날 거니까 애들이 신기해하기에는 충분할 거예요. 그리고 키워서 먹을 생각이 아니시면 조금 키워서 뽑아서 미니당근처럼 애들한테 보여주시면 되지 않을까요?" 음음, 선생님의 너무 긍정적인 말씀에 나도 모르게 용기가 솟았다.


그래서 별 기대 없이 바질씨앗들이 싹이 피우지 못한 여분의 커피 화분(커피 찌꺼기로 만든 친환경 화분)에 당근 씨앗을 엄지 손가락만큼 뿌렸다.

당근 씨앗

그리고 기다리길 며칠째, 역시나 아무 소식이 없었다. 너무 작은 화분에 터무니없이 많이 뿌렸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고 지나쳤는데 오잉!? 어느 날 다른 화분에 물을 주러 아이들과 나갔는데! 헉! 싹이 난 것이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엄청 여러 개가! (위의 난같이 생긴 것이 당근 싹)


싹이 나서 너무너무 신기했다. 아이들도 참 좋아했다. 그런데 막상 싹이 나니 고민이 생겼다. 저번 브런치에서 말했던 "분갈이"를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분갈이.. 생각만 하고 실천할 생각은 별로 없었는데 당근은 뿌리식물이라 밑에서 자랄 텐데.. 게다가 싹이 나서 아이들이 당근을 엄청 기대하고 있는데.. 일이 커졌다..라는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래서 오늘! 임시로 분갈이를 해보려 한다. 아이들이 "강낭콩 키우기" 키트를 받아온 것이 있는데 강낭콩은 나중에 키워보기로 하고 그 안에 들어있던 화분과 흙을 이용해 우선 당근을 옮겨주려는 계획이다. 계획대로 잘 되려나 모르겠다. 여하튼 우리 커피 화분의 작은 아이들은 이렇게 잘 크고 있다.


앞으로도 쑥쑥크자. 막둥이들.

그리고 처음부터 엄청난 개화력을 보여준 우리의 패튜니아들. 데려왔을 때는 각 화분에 한두 송이씩 펴있었는데 지금은 무려........ 한 화분당 20송이가 넘는 개화력을 뽐내고 있다.


그런데 어마어마한 개화력만큼이나 아이들이 시들기도 엄청 잘 시들었다. 그래서 시들어 고개 숙인 애들은 똑똑 따주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책을 읽다가 내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패튜니아 특성상 많이 피고 많이 지는 것도 맞지만 이렇게 무성한데 너무 작은 화분에 계속 놔두는 것은 사람으로 치면 좁은 곳에 가둬놓고 학대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적혀있는 것이 아닌가. 육아에 관한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 책에서 저런 글귀를 읽게 될 줄이야! (역시 책은 모로 가도 도움이 된다.)


그래서 집에 작은 화단을 가꾸시는 엄마에게 물어보니 진작 분갈이를 해줘야 했다고 하시면서 다음에 오실 때 집에 여분 화분과 흙을 가져다주신다고 하셨다. 엄마가 오면 바로 같이 분갈이를 해봐야겠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은 패튜니아 화분을 받았을 때 총 네 개를 받아서 엄마에게 두 개를 드리고 우리 집에 두 개를 놓은 건데 엄마가 보시더니 화단에 옮겨 심은 엄마 집 패튜니아보다 우리 집 패튜니아들이 훨씬 많이 폈다고 말씀하신 것.ㅋㅋ아마 하루 한 번씩 꼬박꼬박 물을 주고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봐준 게 작동한 게 아닐까. 혼자 추측해본다.



마지막으로 가장 최근에 우리 집에 들어온 란타난! 이름도 생소한 이 꽃은 아주 진짜 작은 꽃송이들이 다닥다닥 붙어 마치 주먹밥처럼 피는 신기한 꽃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난 도트무늬 트라우마가 있어서 이렇게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을 견딜 수가 없는데 이 꽃을 볼 때는 아주 조금 괜찮다는 것이다. 물론 오래 들여다보면 정수리부터 시작해 온몸에 닭살이 돋는다. 으...)


이 작은 화분에, 이 작은 한 꽃송이에 너무너무 많은 개화가 이루어져 세어 볼 엄두도 안 난다. 게다가 너무너무 연약해서 조금만 건드려도 시들은 꽃송이도 안시들은 꽃송이도 우수수수 떨어진다. 물을 좋아해서 물만 주면 된다고, 키우기 쉽다고 하셨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건드리기도 조심스러울 뿐 아니라 여기저기서 너무 꽃봉오리들이 많아서 제때제때 잘라줘야 한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고민이다 고민.



남편의 말대로 내가 더 신난 것이 사실이다. 신났다고 단순하게 표현하기에는 수많은 감정들이 섞여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내다보고 시들은 꽃 떼어주고 신기한 듯 오래도록 바라보는 걸 보면 남편 입장에서는 신난 걸로 보일 수 있겠다. 생명이란 참 신비롭다. 자연이라면 학을 떼던 나를 이렇게 변하게 하는 걸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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