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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윤미 Nov 03. 2020

누구나 겪게 되는
자존감 좌절 포인트 두 번째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라는 말

‘나도 내가 좋았으면 좋겠어’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라는 말



머리로는 너무 잘 알지만 실천이 힘들어 괴롭기만 한 자존감 좌절 포인트 두 번째는, 바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한다는 것’이지요.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한다는 말은 대체 어떤 의미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좋은 말인 건 알겠는데 무척이나 모호해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인지 도무지 가늠하기가 어렵기만 합니다.


제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졌을 때입니다.

태어날 아기가 어떤 모습으로 성장할지 상상하는 과정에서, 아이가 저를 닮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나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구나......'

아이가 저 말고 남편을 닮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성별도 저와 다른 아들이어서 좋았습니다. 딸을 낳았다면 그리고 그 아이가 나를 닮았다면 저는 그 아이를 어떻게 대했을까요?

나를 보는 것 같은 마음에 더 보듬어 주고 품어줬을까요?

아니면 나랑 비슷한 모습을 보게 될 때마다 답답한 마음에 아이에게 더 자주 화를 냈을까요?

그건 알 수 없지만 아이가 나를 닮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제 마음을 통해 확실히 알 수 있었던 건 바로, 제가 저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것도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말이죠.


내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데, 어떻게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요?

그 말은 부족하고 결점 투성인 나를 그냥 인정하라는 말로 들려서 제 마음을 더욱 불편하게 하곤 했습니다.

이번 생은 글렀으니깐 닥치고 그냥 생긴 대로 살아!라는 말로 들렸거든요.

부족한 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포자기로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더 나은 나로 나아가야만 하는데! 지금의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의 의미는 곧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기 계발을 포기한다는 의미로 해석되었거든요. 도저히 그럴 수 없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저는 정말 별로였으니깐요.


학창 시절부터 새해, 새 학년이 되면 아무도 나를 모르는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비현실적 소망을 품곤 했습니다.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이어야 안전했습니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내가 꿈꾸는 모습으로 연극을 시작할 수 있으니깐요.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나를 알아보면, 내가 원래 그렇지 않다는 것을 들키면 저는 완벽한 신분위장을 실패하게 되고, 연극 무대에서 내가 하려는 배역을 당당하게 소화해내지 못할 것만 같았거든요.

물론 이 모든 것은 마음속 공상으로만 존재했지만, 매년 저는 이런 셋업 환상을 꿈꾸곤 했습니다.

그 이면에는 이상적인 자기상을 그려놓고 그렇게 되기를 강력히 소망하는 제가 있었습니다.

한치의 실수도 허용되지 않았기에, 실수가 있으면 바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셋업 환상을 꿈꾸게 하였습니다.



내가 해왔던 모든 활동은
성장이 아닌
결점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제 안에는 '이렇게 되어야 한다.'라는 이상적인 이미지들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내가 되어야 하는 존재인 그 이미지는 참 똑똑하고 싹싹하고 당당하고 자신만만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였습니다. 그에 비해 현실 속 나는 너무나 초라해 보였습니다. 어떻게든 노력해서 내가 만들어 놓은 이상적인 자기상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부인해야 한다고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려놓은 자기상은 신이라도 그렇게 하지 못할 정말 완벽한 모습이었고, 이것은 사람이 아닌 괴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치의 실수도 허용하지 못하고 모든 것에서 완벽하기만 한 사람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요? 그것이 사람일까요?

결국 저는 괴물이 되기를 소망했고, 괴물이 되기 위해서 그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어가며 노력했던 겁니다.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허탈했습니다. 내가 대체 무엇을 위해 노력했는지 방향을 알지 못한 채 마구잡이로 닥치는 대로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건 내가 성장해야 할 방향을 정해놓고 가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내 결점을 감추는 것이 최우선 목표였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대체 왜 그렇게 까지 한 걸까요?

뭐가 그렇게 부족한 것 투성이라고 나를 그렇게 몰아세웠던 걸까요? 지난날의 고달팠던 나를 안아주고 싶습니다. 나는 나를 너무나 학대했습니다. 외롭게 했고 슬프게 했고 화나게 했습니다. 그건 다른 사람이나 세상이 아니라 내가 나를 그렇게 대했습니다.

어린 시절, 저를 최고라며 치켜세워주는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없어 순간순간 아쉬웠습니다. 근데 커서는 내가 나를 그렇게 대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도 여전히 저는 무엇인가를 잘했을 때, 스스로를 치켜세워주기보다는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한 것이라고 여깁니다. 누구보다 칭찬받고 인정받기를 바라면서 스스로가 그러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우울한 역사를 다시금 반복하고 있는 현실이 한없이 서글픕니다.

제가 극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바로 지금, 과거를 되풀이하고 있는 현재이고 그 주체가 바로 저란 사실입니다.



이기적이어도 괜찮아.
그래도 괜찮아.
그렇게 해도 괜찮아.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인정하는 것이란 어렵지 않습니다.

바로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게 괜찮다고 인정해주고 알아주면 됩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피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알아주는 겁니다.


나는 이제 누구보다 먼저 앞서서 내가 내 편이 되어 줄 것입니다. 내가 먼저 나를 지지하고 위로하고 변호해 줄 겁니다. 내가 나를 먼저 챙겨도 됩니다. 그래도 됩니다. 이기적인 게 아닙니다. 이기적으로 보일까 봐, 이기적이다는 말을 들을까 봐 노심초사하지 마세요.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또한 자기 입장에 서서 바라보기 때문이지요. 결국 똑같은 겁니다. 그가 내 입장에서 나를 바라본다면 이기적이라고 하기보다는 지지를 해주는 것이 맞겠지요.

그러니 나는 나를 위해주고 적극적으로 변호해주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제 아이를 바라보면 정말 소중하고 귀하다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근데 그렇게 소중하고 귀한 아이가 우주만큼 사랑한다고 열창하는 대상이 바로, 엄마인 저입니다.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아이가, 가장 소중하게 바라보는 대상이 저인데 제가 어떻게 귀하고 소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제가 어떻게 하찮고 별로일 수 있을까요?

내 아이가 바라보는 엄마인 저는 아이의 우주 그 자체인걸요.

누군가의 우주라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정말 위대한 존재 아닌가요?

그러니 스스로를 아껴주세요. 스스로를 위해주세요. 누군가에게는 우주 같은 존재인 자신을요.



CHECK POINT

누구에게나 그림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그림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뚝 떼어내 버릴 수 없습니다.

그림자를 끌어안고 가야 합니다.

그 그림자도 나입니다. 내 것입니다.

그림자를 어떻게 하면 안 보이게 감출 수 있을까에 에너지를 쓰기보다는 그림자와 잘 지내는 법을 알아야 하고, 그것은 내게 그림자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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