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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릇 Jul 21. 2022

겨울의 사랑

어린이집을 다닌 뒤부터는 방학마다 할매할배의 집에 갔다. 여름과 겨울의 한가운데에  있단 확신이  , 안동으로 향하는 차에 몸을 싣었다. 겨울의 안동은 꽤나 지루하다. 농사짓는 곳이  그렇겠지만 겨울엔 농작물을 수확하지도, 씨를 뿌리러 다니지도 않는다. 안동시 서후면의 농사꾼들은  즈음이 찾아오면 농기구를 닦아두거나 곶감을 말리며 시간을 보낸다. 해도 길고  일은 없고 무료하게  바람 부는 마당을 보는  일상이었다. 게다가 가을  추수한 콩을 가지고 메주를 잔뜩 쑤어 따뜻한 사랑방에 이불 덮어 보관하곤 했는데, 냄새가 고약하기 그지없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코를 찌르는 메주 발효 냄새. 안동에 다녀오면 한동안 옷에서 메주 내음이 남아  끝을 맴돌았다.  일도 없고 냄새가 고약한 겨울의 안동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어린 손녀가 겨울방학에는 ‘재미없어’를 입에 달고 사는 게 영 신경이 쓰였던 지, 할매할배는 늘 재미난 장난감을 준비해뒀다. 이를테면 그 나이대 여자애들이 좋아할 만한 색칠 물감이라던가. 크레파스와 색종이 같은 것들 말이다. 그것들을 사러 시내까지 다녀오곤 했다. 시장까지 갈 수 있는 버스는 딱 한 대, 하루에 8번 운행한다. 그러니 시간을 잘 맞춰 나가야 집에 돌아올 수 있는 셈이다. 할배는 운전면허 없이도 오토바이와 경운기로 서후면 시내를 누비던 폭주족이었지만, 시내에 갈 땐 항상 버스를 탔다. 모르는 길은 직접 걸어보고 나서야 운전한다, 이게 할배의 철칙이었다. 노부부에게 버스를 탄다는 건, 시내에 가서 사야 할 물건이 생겼다는 뜻이기도 하다.


서후면에 물건 살 곳이 없었냐 하면, 그건 아니다. 마을엔 점빵(동네 슈퍼마켓을 이르는 말)이 3개 있다. 금성 슈퍼와 서후 슈퍼, 그리고 하나로 마트.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이곳에서 파는 물건의 종류가 상당히 제한적이다. 두부, 담배, 아이스크림, 도화지, 막걸리, 탱탱볼이 뒤섞인 정체모를 것들이 먼지 쌓인 채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서면 사람 좋게 인사해주는 아주머니가 반겨주는 곳이었고 안동시 서후면의 역사와 오래 함께 한 곳이다. 이곳에는 소위 ‘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색칠 물감이나 색종이는 없었다. 있다고 해도 국민학교 시절 애들이 좋아할 만한 디자인뿐이었다. 그러니 할매할배는 읍내 애들이 좋아할 만한 것을 찾아보겠다고 점빵 말고 시장까지 가서 장난감을  사 오곤 했던 게다.


그러니 내가 도착했을  이것저것 재미난 물건들이  안에 가득했다. 물로 그림을 덧그릴  있는 크레파스, 후후 불어펜, 학알 접기 종이까지. 할매, 할배는 그것의 쓰임조차 알지 못했다. 분명 시장 어디선가 ‘아줌메, 우리 아가 다섯살요.  좋다칼까물어가며 사 온 것이었을 테다. 그렇게 힘들게 장난감을 구해왔단 사실을 한참 나중에야 알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야 점빵엔 ‘트렌디’한 장난감이 없단 사실을 깨달았으니 말이다. 내가 도착하기 전에 준비된 장난감들은  도착하자마자   있도록 거실 한가운데에  세워져 놓아져 있었다.


상대의 즐거움을 위해 넉넉하게 품과 시간을 나누는 일, 그것이 그들의 사랑이라는 걸 꽤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한 겨울 할매할배의 사랑은 고약한 메주 냄새였고 버스를 타고 달리는 마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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