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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쏘냐 정 Jul 01. 2024

눈물조절시스템이 고장 났을 때

눈물 많은 아이가 어른이 되었다.

어릴 적 나는 눈물 많은 아이였다. 나도 당황스러웠을 정도다. 눈물 흘릴 상황이 아닌데 자꾸 목이 메어 할 말도 못 하는 내가 답답했다. 남 앞에서 우는 게 민망한 건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나도 울기 싫은데 자꾸 눈물 나는 걸 어쩌란 말인가. 그저 그렇게 타고 난 사람도 있으니 왜 우냐고 묻지 말아 달라고, 지금 당신 눈에 보이는 눈물은 떠다니는 먼지 취급 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신입사원 시절, 제일 걱정한 것도 눈물이다. 직장에서 눈물 흘리는 건 프로답지 않으니까. 프로까지 가지 않더라도 기본적인 직장인의 모습도 아니지 않은가. 눈물이 내 결과물을 평가절하할 빌미가 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눈물이 나려고 하면 얼른 화장실로 피했다. 부장님한테 억울한 일로 크게 깨졌을 때는 화장실 한 칸 문 걸어 잠그고 두루마리 휴지를 조금씩 잘라 뭉쳐서는 벽에 던지면서 울었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그러고 나면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사무실로 돌아갈 수 있었다. 


물론 눈치 없는 눈물은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어서 몇 번 사람들 앞에서 울기도 했다. 여전히 나는 눈물 많은 사람이었으니까.


AI drawing by CANVA




작년 여름, 7살이었던 둘째 팔이 부러졌다. 아파서 한 발짝도 떼지 못하는 아이를 데리고 입원하던 날 간호사가 물었다. "바늘을 꽂아야 하는데 지금은 밤이라 도와주실 분이 없어요. 내일 아침에 꽂을게요." 혹시라도 얼른 하는 게 더 나은가 싶어 "괜찮아요. 제가 잡으면 돼요." 했더니, "이게 수술용 바늘이라 많이 굵어요. 아이가 움직이면 위험한데 보통은 아이가 많이 울다 보니 어머니도 같이 우느라 못 잡아주시는 경우가 많아요." 하더니 아침에 다시 오겠다며 돌아갔다. 아이 팔에 필요한 바늘을 꽂는 건데 엄마가 왜 우는 거지? 의아했던 나는 다음날 아침 결국 아이를 붙잡는 역할을 하게 됐다. 왜인지 도와주는 분이 같이 오질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차분하게 아이에게 말했다. "좀 아플 거야. 그런데 네가 움직이면 더 많이 아플 수 있어. 다시 해야 할 수도 있고. 아프면 울거나 소리 질러도 돼. 하지만 절대로 움직이면 안 돼." 주삿바늘이 들어가고 아이가 우는 걸 보면서도 나는 전혀 울고 싶어지지 않았다. 


"엄마, 이상해. 전혀 눈물이 안 나더라고." "너 엄마 닮았나 보다. 중요한 순간에는 오히려 침착해지는 거." 으음, 맞다. 엄마 닮은 게 맞는데 지금 포인트는 그게 아니다. 중요한 순간에 침착해지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달라진 건 예전에는 침착해지면서도 눈물이 났다면, 지금은 건조한 침착이 유지된다는 거다. 


4년 전 첫 책이 나오고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북토크나 강연할 일이 많아졌다. 눈물 없이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풀 때도 많다. 그럴 때면 혼자 리허설하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래그래. 그럴 만도 하지. 어쩔 줄 몰라하면서 지난날들이었잖아. 그때 힘들었잖아. 그래도 기어이 넘어왔잖아.' 나를 도닥도닥하면서 한편으로 걱정한다. 강연하다가 울면 어쩌지? 그런데 막상 사람들 앞에 서서 울먹인 적은 한 번도 없다. 마케터로 일할 때 직업병처럼 몸에 익어서인가, 앞에 서면 프리젠터가 된다. 나를 프로로 인식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하다. 가끔은 이 절절한 스토리가 절절하게 안 들리면 어쩌지 걱정될 정도다.


눈물조절시스템. 타고나기를 눈물이 많은 나 같은 사람이 40년 넘게 신경 쓰며 살다 보면 저절로 장착된다. 덕분에 이제 타인을 앞에 두고 우는 일은 잘 없다.


그런 줄 알았다.




남편이 갑자기 입원했다. 기껏해야 위궤양 정도일 줄 알았다. 출혈이 보이지 않는다며 퇴원하자길래 그대로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소장에서 혹이 발견됐고 수술까지 했다. 너무 걱정됐지만 내게는 아이들이 있었고, 늘 고민상대가 되어주었던 남편은 현재 고민 원인인 환자 당사자다. 아이들 앞에서 나는 어느 때보다 안정적인 엄마를 연기해야 했고, 남편 앞에서도 최대한 흔들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종종 인스타그램에 상황을 업데이트했지만, 사실 거기에 쓰지 못한 말들이 더 많다. 더 무서운 이야기는 차마 쓸 수 없었다. 가족과만 나눌 수 있었던 자세한 상황은 소화기 내과 의사인 친구와만 공유했다. 궁금한 게 생길 때마다 물어볼 전문가가 있어 얼마나 든든하던지. 여행 중에도 진심을 다해 알려주고 위로하는 친구에게 정말 고맙다고 하자 친구가 말했다. 


"계속 연락 줘. 궁금한 거 생길 때마다. 아이가 감기만 걸려도 온 집안이 비상인데.. 네가 얼마나 힘들고 속상할지.. 상상이 안된다.. 그래도 정말 의연해 보여서 대단하기도 하고.."


징징거리기 싫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못 먹고, 못 자고, 숨어서 많이 울었다. 혼자 담고 있기는 버거워서 글로 꺼내놓으면서도 나를 나무랐다. 무서운 이야기가 매일 조금씩 쌓였고, 수술 즈음이 이르러서는 타인에게도 눈물을 보였다. 어느 날은 전화통을 붙들고 엉엉 울었다. 눈물조절시스템이 고장 났다. 


동시에... 나를 계속 나무랐다. 이러지 마. 네가 더 단단해야지. 네가 이러면 안 되지. 


그런 나에게, 제일 많은 걸 속속들이 아는 친구가, 속속들이 묻고 묻는 나에게, 의연하다는 말을 해주어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다. 이럴 때 나는 내가 약한 게 아니라 당연한 거라고 믿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진다. 누군가에게 좀 더 기대도 된다는 안도감. 


사실 인스타그램에 비슷한 이야기를 썼었다. 흔들려도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썼다는 글에, 힘든 게 당연하다는 댓글이 달렸다.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지만 기대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훨씬 나아졌다. 덕분에 나는 오늘도 지난다. 내일도 기어이 지나갈 것을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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