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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할 수 없어 시작한 프랑스 자수

시간을 꽉 채워 나를 버티게 했던,

by 쏘냐 정

2016년 늦봄, 둘째를 임신했다. 둘째를 낳아야지 마음먹은 지 1년 반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이제 다 그만두자며 "끝~" 외치고 떠난 여행에서 자꾸 하혈을 해서 임신 사실을 알았다. 한국에 오자마자 산부인과부터 갔고 유산방지제를 처방받았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입덧은 심했고, 안정기라는 중기에도 종종 유산기가 보였다. 여러 가지 이유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퇴사하고 첫째를 어린이집에 보낸 순간부터, 돈은 벌지 않아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 봄에는 티인스트럭터 자격증을 따고 평생교육원 해당 강의에서 조교로 봉사하고 있었다. 상황을 확인하고 바로 2학기부터는 봉사가 힘들다고 연락했다. 할 일이 없어졌다.


프랑스 자수를 시작한 건 무료함이 극에 달한 임신 중 후반기였다. 손 쓰는 일을 좋아해 바느질이나 뜨개질은 종종 했지만 자수는 왠지 어려워 보여 시도하지 못 한 분야였다. 그런데 그때 내 눈에 딱 들어온 거다. 정기 강의를 듣기엔 무리라 원데이 클래스를 하나 찾았다. 한 번만 직접 보고 다음부터는 독학하면 되겠지 싶었다.


여러 계절이 지나 크리스마스를 앞둔 겨울이었다. 원데이 클래스 주제는 크리스마스 카드였고, 그 자리에서 야무지게 배워 집에 와서 카드 두 장을 완성했다. 덕분에 그 해 크리스마스엔 양가 부모님께 특별한 카드를 드릴 수 있었다.

해보니 할 만했다. 재밌기도 하고. 조심해서 움직여야 하는 내게 딱 맞는 취미였다. 그래서 이번엔 책을 하나 샀다. 이제부터는 혼자 해야 하니까. 여러 번의 책장 정리에도 살아남아 아직도 꽂혀있는 이 책. 아마 나는 예쁘고 사랑스러운 걸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곧 두 아들 엄마가 될 내 안에는 소녀가 있었다.


첫째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면 자수 재료와 책을 챙겨 소파에 앉았다. 때로는 조심조심 집 앞 카페에 가서 앉기도 했다. 책을 펴고 수틀을 들고 바늘을 가만가만 꽂고 당기면서 시간을 보냈다. 무료함이 사라졌다. 매일 첫째가 어린이집에 가고 없는 시간을 기다렸다.


실과 바늘과 나로 완성하는 시간. 책 속 도안 중에 마음에 드는 순서로 하나하나. 이 글을 위해서 오래 넣어둔 자수 주머니를 다시 열었다. 잊힌 채 꾸깃꾸깃해진 나의 작고 소중한 작품들이 그 안에서 나왔다.

첫 작품은 책 표지에서부터 내 마음을 끌었던 롤케이크들. 다양한 자수법을 하나하나 연습하는 마음으로 만들었다.

두 번째 작품은, 첫째가 시댁에 간 짧은 시간에 완성하기 위해 선택한 비교적 간단한 도안.

세 번째 작품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인데, 지금 찾아보니 보이지 않는다. 따로 꺼내 소중하게 보관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덕분에 찾지 못하는 아이러니. 그래서 당시에 올렸던 블로그에서 사진을 가져왔다. 지금 찍는다면 그림자 들지 않게, 색도 더 밝게 찍었을 텐데 아쉽네. 실물은 이것보다 훨씬 예쁜데 말이다.

요게 마지막 아이, 보시다시피 미완성이다. 예정일이 다가오고 있어 자수 분량이 많지 않은 도안으로 골랐는데, 둘째가 예정일보다 일주일 빨리 나왔다. 그다음은... 엄마들이라면 다 상상할 수 있는 그런 상황. 자수 따위 손에 잡을 겨를이 없었다. 좀 키워놓고 나면, 여유가 생기면, 다시 천천히 완성해야지. 했는데... 여전히 미완성이네? 저렇게 수틀에 끼워진 채로 6년을 보내서, 구겨진 부분 다림질로 펼 수는 있을는지 모르겠다.


언젠가는 완성할 수 있겠지? 또다시 실과 바늘과 나, 그리고 책만 있으면 시작할 수 있을 테니까.


반년도 되지 않는 짧은 취미 생활이었지만 꽤나 진심이었다. 40개 들이 Gold Eye 바늘도 샀고, 예쁜 바늘꽂이도 샀고, 집에 있는 다른 가위로도 잘 자를 수 있지만 보는 순간 너무 예뻐 포기할 수 없었던 자수 가위도 샀다. 도안을 그리기 위한 물에 지워지는 펜과 얇은 종이, 실수한 바늘땀을 정교하게 뜯어내는 도구까지 야무지게.

돌아보니 더 짧은 시간이었다. 프랑스 자수를 떠올릴 때마다 묵직하게 채워지는 기쁨에 비해서는 말이다. 입문의 턱도 넘지 못했지만, 이건 분명히 내 취미였다. 과거의 내가 무거운 시간을 가벼이 지나게 했고, 지금은 추억에 불과하지만, 미래에는 또다시 세상 고마운 친구가 되어줄지 모르는, 내 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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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