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합니다.
"글을 일찍 읽으면 상상력을 발달시키는 데 안 좋대." 엄마들의 카더라 통신과 각종 육아서가 말하는 이야기 중 가장 가슴에 콕 박혔던 말이었다. 글을 읽기 시작하면 글에 집중하느라 그림책의 그림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글을 읽을 수 있으면 줄거리를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머릿속에서 스토리를 상상하고 즐기는 경험을 하기가 힘들다. 엄마의 목소리로 책을 읽어줄 때 느끼는 심리적 따스함과 그 분위기에서 만들어지는 상상력 역시 잃게 된다.
마케팅을 업으로 삼았지만 창의력의 문턱에서 번번이 좌절감을 느꼈던 사람인지라 아이의 상상력은 세상 최고 중요한 자질로 여겨졌다. 그래서 결심했다. 아이에게 한글은 최대한 천천히 가르치기로. 한편으로는 책을 좋아하는 아이이니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본인이 원하면 알아서 터득하겠지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래서 스스로 읽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스스로 한글을 떼는 날은 오지 않았다. 나름 똘똘하고 책을 좋아하고 호기심도 많은 아이였지만 스스로 읽고자 하는 의지를 키우는 대신 많이 많이 읽어달라 요청만 했다. 그러다가 6살 후반쯤, 첫째를 초등학교에 보내는 유치원 친구 엄마에게서 초등 1학년의 현실을 듣게 되었다. 교과서의 문제들이 꽤 길어서 한글을 읽는 것을 넘어 장문을 이해해내는 능력이 있어야만 풀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 이제 한글을 가르칠 때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프뢰벨을 신뢰했던지라 프레벨 영사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 첫째한테 이제 한글을 좀 가르치려고요. '읽기' 프로그램 주문할게요."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질문. "둘째 아니고 첫째요?" "네. 우리 첫째 아직 한글 못 읽거든요. 이제 좀 읽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러자 그분이 이야기했다. "어머님, 대단하세요. 7살 다돼가는 아이 한글 못 읽는다고 당당하게 말씀하시는 분은 잘 없으신데." (그분의 뉘앙스는 비난이 아닌 진짜 리스펙이긴 했지만) 졸지에 대단한 엄마가 된 나는 '흐음, 6살까지 한글 못 읽는 게 어때서.....'라고 생각하며 더 당당하기로 했다.
보통 늦게 한글을 배우기 시작하면 금방 읽는다고 하던데, 우리 첫째는 사실 처음엔 지지부진했다. '으음' 싶었는데 조금 지나니 가속도가 붙었다. 그가 한글을 떼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일등공신은 포켓몬 백과. 친구들 좋아하는 변신로봇, 팽이 장난감 이런 거 좋아해 본 적 없는 아이인데 어느 날 포켓몬에 푹 빠졌다. 한글을 조금 배우기 시작하더니 두껍고 글자도 작은 포켓몬 백과를 매일 붙들고 읽기 시작했다. 이 단어 물어보고, 저 단어 물어보고. 게임용어 모르는 엄마는 또다시 아빠에게 물어보는 날들의 연속. 아이는 한글을 제법 잘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1년여의 시간이 지나고 이제는 글밥이 많은 초등 저학년용 책도 혼자서 제법 읽는다. 아이가 글을 읽고 쓰게 되니 엄마는 여러모로 편해졌다. 그중 제일 좋은 점은 '함께 책 읽기'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라고 책 읽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라는데 책 읽는 모습을 보여줄 타이밍을 찾기는 항상 힘들었다. 그런데 이제야 책 읽는 모습을 마음껏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작년 말부터 꾸준히 도전하고 실패를 반복하고 있는 새벽 기상. 내가 새벽 기상을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독서량을 늘리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잠 없는 우리 집 아들들은 너무 일찍 일어난다. 날도 추워지고 거실에 나가기 싫어 침대에 롱 쿠션을 올려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첫째가 깨서 안방으로 왔다. (아빠는 둘째와 둘째 방에서 취침 중) 독서시간이 끝나 아쉬운 마음이 들려던 찰나 "같이 읽자고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축복아, 엄마랑 같이 책 읽을까?"
아이는 바로 "좋아요."라고 답했다. 얼른 방에 가서 어제 읽다 만 책을 들고 왔다. 롱 쿠션 한쪽에는 엄마 책, 한쪽에는 아들 책. 이렇게 책을 읽는 순간이 얼마나 행복하던지. 따뜻한 이불속, 옆에 앉은 아이의 온기와, 책에 집중하는 모습, 그리고 나의 독서시간 확보까지. 정말 완벽한 아침이었다.
이 뿐이 아니다. 이제 아이와 카페에서 책 읽기도 가능하다. 아빠가 출근한 주말. 둘째는 시댁에 맡겼더니 첫째와 데이트가 가능해졌다. 카페에서 샌드위치가 먹고 싶다는 아이. "그러면 가서 샌드위치 먹고 엄마랑 책 한 권씩 읽을까?" 했더니 OK.. 책 한 권씩 챙겨 카페로 향한다.
아이가 한글을 떼니 좋은 점 한 가지 더.
이제 아이가 글을 읽을 줄 알게 되니 사랑고백을 메모로 한번 해볼까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아침 유치원 식판을 챙기다가 포스트잇 한 장 붙여 "축복아, 사랑해!!" 이렇게 적어주었다. '점심때 식판 꺼내면 보고 좋아하겠지?' 생각하며 서프라이즈로 붙여두었는데, 막상 하원하고 와서도 별 말이 없다. 한참 있다가 "참, 엄마 오늘 식판에 편지 붙어있더라." 무심히 한마디 던지더니 모르는 척. 그래서 역시 아들이라 별 감흥이 없었나 했는데 저녁때쯤 포스트잇에 "엄마, 축복이는 엄마를 사랑해요."라고 써오더니 부엌 벽에 붙여놓으란다. 이야, 아들에게 편지로 받는 사랑고백. 꽤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며칠 뒤 유치원 선생님과 통화할 일이 있었다. 용건을 마치고 끊으려는데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참, 어머님. 며칠 전에 축복이 식판에 메모 붙여 보내셨잖아요. 축복이가 그거 떼서 오더니 저한테 이게 식판에 붙어있었다면서 자랑하더라고요. 오후 내내 싱글거리면서 그 메모 얘기했어요.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그랬던 거다. 집에 와서 표현은 안 했지만 아이는 그 메모 덕분에 행복했던 것. 그래서 나에게 답장을 건네주었던 것.
그 후로는 종종 이런 메모를 써서 준다. 여행을 가서 숙소에서 메모지와 연필을 발견하더니 또 이렇게 한 장.
이런 소소한 행복이 이어지는 요즘. 둘째에게도 빨리 한글을 가르쳐 행복을 2배로 만들어 보고 싶은 마음도 슬금슬금. 하지만 아직 4살인 둘째는 상상력을 맘껏 발휘할 시간을 충분히 누리도록 그냥 두는 걸로. 뭐, 사실 첫째와 둘째의 성향이 너무나 달라 한글을 가르쳐도 이런 행복 따위 주지 않을지 모르니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는 걸로.^^
한글을 가르칠 날은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던 첫째가 어느새 한글을 뗐다. 그리고 올해는 초등학교에 간다. 초등학교에 대한 기대로 가득한 아들의 초등 생활이 기대처럼 즐거웠으면 좋겠다. 그리고 엄마는 아이가 막 한글을 읽고 쓰며 이런 행복을 느끼게 했던 날들을 기억하기 위해 이렇게 기록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