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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정수 Sep 09. 2024

아빠~ 여기 완전 내 스타일인데, 중학교는 없어?

산골 들어오던 첫날, 딸내미 눈이 하트로 변했다

눈 덮인 조침령 고갯길을 올라 양양 쪽이 내려다보일 무렵, 아이가 탄성을 질렀다. 온통 눈으로 뒤덮인 겨울왕국 실사판을 만난 기분이었을 거다. "아빠~ 여기 완전 내 스타일인데, 중학교는 없어?" 아이가 소리를 질렀다. 사실 알고 있다. 아이도 아이 엄마도 나도, 우리는 1년의 기한으로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진동 2리 설피마을에 살면서 진동분교에 다니게 될 거라는 사실을. 이미 약속을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경의 강렬한 이끌림은 모든 걸 있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간신히 도로만 치워놓은 설국은 3월 하고도 2일이나 됐지만 아직도 건재했다. 도로변으로는 제설차가 밀어놓은 눈이 어른 키 높이만 한 장벽을 이루고 있었다. 진동삼거리에서 곰배령 쪽으로 방향을 틀어 진입했다. 길이 끝나는 곳을 향해 갈수록 설국은 위세를 드높이고 있었다. 키높이로 눈이 쌓인 벌판, 학교와 마을 펜션만 간신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개학을 앞둔 산골유학 아이들은 마을 펜션 한편에 치워놓은 산을 이룬 눈더미에서 눈썰매를 타고 있었다.

처음 설피마을에 들어왔을 때는 진짜 눈나라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기존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약간 갖고 있었지만 첫날부터 아이들은 잘 어울렸다. 숙소에는 펜션 6동이 붙어있는데, 한 집은 귀농귀촌으로 오신 중장년 부부였고, 다른 한집은 6년째 진동분교를 다니게 된 막내아들이 있는 3남매 집이었다. 세 가구는 생태유학으로 도시에서 왔는데, 각각 천안, 수원, 구리에서 왔다고 했다. 6학년 2학년 남매, 6학년 4학년 남매, 2학년 남녀 쌍둥이다. 우리 집 딸내미까지 합쳐서 8명이 마을펜션에 붙어서 살게 된 것이다. (여기에 별도 숙소에 사는 1학년이 한 명 더 있다. 그래서 진동분교는 전교생이 9명이다.)


다행히 아이들은 모두 비단 같은 마음을 가졌다. 처음 보는 전학생이지만 누구 하나 텃세 부리지도 않았고, 선뜻 곁을 내줬다. 학생수가 적어서 혹시 아이들끼리 잘 어울리지 못하면 굉장히 고충이 클 수도 있었던 상황이지만 아이들은 내가 자라던 시절 동네 친구들 같은 수더분하고 천진난만한 친구들이었다. 우리가 산골마을에 들어왔던 그 겨울은 20년 만에 정말 눈이 많이 왔던 겨울이라고 동네분들이 입을 모았다. 안 그래도 눈이 많아서 설피를 신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다 하여 옛 이름이 '설피밭'이었다고 하는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눈 쌓인 벌판은 사과나무 과수원이었을 정도로 눈이 많이 쌓였다. 눈 아래 뭐가 있을지 몰라 눈밭을 밟을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개학을 하고 나서도 한 달 정도는 눈세상에서 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들에게 눈밭용 선글라스를 해줬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다시 눈이 쌓이기 전에 도수 있는 선글라스를 맞춰줘야겠다. 아이들은 호미와 삽을 들고 눈을 파서 계단을 만들고, 눈썰매장을 만들었다. 바지가 옴팡 젖을 정도로, 볼이 새빨개질 정도로 열심히 눈밭에서 놀았다. 눈밭 뒹굴기를 좋아하는 우리 집 딸내미는 실컷 눈밭에서 뒹굴렀다.

아이들이 눈썰매를 즐겨 타던 마을 숙소 뒤편. 아이들은 여길 '바람의 언덕'이라고 불렀다.

동네 산책을 하다가 아무렇게나 눈밭 위로 던져놓은 고라니 사체, 배수로에 처박힌 산양 사체를 만나는 일이 왕왕 있었다. 이곳 설피마을의 자연이 풍부하다는 방증이기는 하지만, 안타까운 생명이 희생된 장면을 목격하는 건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드물게는 살아있는 노루가 차도 위를 뛰어다니다가 산으로 올라가는 장면을 보기도 하고, 밤길 한가운데 떡하고 버티고 있는 고라니를 만나기도 했다. 비 오는 날 길 위에 다닥다닥 올라앉아 산으로 올라갈 차례를 기다리는 개구리를 맞닥뜨리는 경험도 있었다. 밤에 별을 보러 갔다가 귀가하는 길에 오소리가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길 옆으로 지나갔던 일도 생생하다.


아생동물을 좋아하고 자연 관찰을 좋아하는 우리 집 딸내미에겐 문을 열고 한 발짝만 나가도 야생이 펼쳐지는 놀라운 곳이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리 집 딸내미가 야생동물보다 더 좋아하는 게 있었다. 그것은 바로 '친구들'이다. 나이가 많다고 갑질을 하는 언니 오빠도 없고, 덩치가 크다고 위세를 부리는 아이도 없다. 누군가 다치면 함께 울어주고, 기쁜 일이 생기면 축하해 주는 그런 친구들을 설피마을에서 만난 거다. 이곳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싶을 만도 하겠다. 십분 백분 이해가 간다.

마을은 딸내미의 전입을 현수막을 걸면서까지 환영해 줬다.

산골유학을 아는 사람들은 우리를 부러워한다. 굉장히 많이. 이미 아이들은 방송인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TV 출연이 잦았다. 그만큼 산골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부러움과 호기심 섞인 눈으로 보는 시선이 많다는 뜻이리라. 한편 산골유학을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를 미쳤다고 한다. 애를 그렇게 놀려서 나중에 어떻게 하려고 하냐는 질책이 가득하다. 뭐가 정답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정답이 있기는 한 건지도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이들에게는 놀 권리가 있다는 건 확실하다.


"아동은 휴식과 여가를 즐기고, 자신의 연령에 적합한 놀이 및 예술과 문화활동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유엔아동권리협약 제31조.


일부의 우려만큼 산골유학 아이들은 대책 없이 놀지는 않는다. 각자의 부모가 짜놓은 플랜이 있고, 산골생태유학을 진행하는 인제로컬여행사업단이 짜놓은 프로그램도 있다. 진동분교의 훌륭한 선생님들이 담당하는 훌륭한 정규 교육과 방과 후 학습도 있다. 학원 뺑뺑이는 없지만 아이들은 꽉 차게 하루를 보낸다. 재미있고 보람 있고 의미 있고 의리 있는 하루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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