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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유 May 27. 2024

친정엄마의 반찬은 사랑입니다.

소중하지만 보관하기 어려운 것

운전 면허증 없는 순도 100% 뚜벅이다.


"운전 언제 배울 거야? 남의 집 딸들은 지들이 운전해서 친정도 자주 오는데, 남편 없이는 오지도 못하니 너도 참...... 돈 줄게, 운전 배워!"


결혼하고 10년째 듣는 똑같은 레퍼토리 잔소리다. 시집간 딸 자주 보고 싶어 하는 친정엄마의 마음이야 이해하지만 일하랴 육아하랴 운전 배울 시간까지 내어줄 여유가 없다. 더군다나 애는 봐주지도 않으면서 면허만 따라는 친정엄마의 볼맨소리가 야속하게 들리지만 잘 참아낸다.

일 년 중 명절과 가족 생일 외에는 친정을 찾아가는 일이 드물기는 하다. 먼 지방도 아닌데 교통편이 불편하다 보니 귀찮음이 발목을 옭아맨다. 친정부모님이 딸네 집을 찾아올 때도 있지만 돌아갈 때는 내비게이션을 틀어도 길눈이 어두워 예상시간보다 늦게 도착하는 불상사가 여러 차례 일어났다. 몇 번의 고생길을 경험한 후로는 우리 집을 흔쾌히 오겠다는 말이 사라졌다.

5월은 어린이날, 어버이날, 둘째 아이 생일이 있다. 자주 갈 수 없는 친정에는 가게 되면 3가지 행사를 한 번에 다 치르고 온다. 딸이 올 거라는 확신의 5월이기 때문에 친정엄마의 마음이 분주해진다. 오랜만에 오는 딸내미 반찬을 만들어주고자 가기 며칠 전부터 연락이 온다.


"뭐 먹고 싶어? 말해봐. 애들 말고 너 먹고 싶은 걸로."

"힘든데 뭘 해. 그냥 계셔."

"파김치 담아줄까? 너 파김치 좋아하잖아."

"괜찮아 입맛도 없는데, 엄마 그냥 쉬셔. 주말에 갈게"




친정 가는 날, 출발했다고 연락하는데 친정엄마가 계속 부재중이다. 친정아빠, 엄마 다 카톡을 해도 대답이 없어 혹시나 어디가 편찮으신가 걱정이 앞선다. 아침부터 연락을 해도 감감무소식에 남동생한테 연락을 해보니 두 분 다 주방에 계신다고 한다. 분명 반찬 필요 없다고 쉬시라 말했거늘 말 안 듣고 두 분이서 동분서주한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애들 키운다는 핑계로 해드리는 것도 없는데 딸내미 반찬을 만들고 있을 부모님을 생각하니 면목이 없다. 하필이면 오랜만에 가는 친정인데 커다란 쇼핑백에 빈 반찬통만 가득 채워가는 철없는 딸내미의 손이 오늘따라 더 부끄럽다.

아이들이 할머니, 할아버지를 부르며 집안으로 들어간다. 친정아빠가 젖은 손을 급하게 훔치며 현관문으로 달려와 아이들을 반갑게 맞아주신다. 역시나 친정엄마는 주방 인덕션 앞에서 요리하느라 분주하다.


"아무것도 하지 마라 했는데 뭐 해?"

"너 요새 입맛 없다고 해서, 네가 좋아하는 오이소박이랑 파김치 조금에 물김치도 약간만 하고 깻잎김치, 진미채 지금 볶고 있어. 이따가 갈 때 가져가"

"어머, 뭘 이렇게 많이 했어. 엄마 힘든데 하지 말고 쉬라 했잖아."

"괜찮아, 너 오랜만에 오는데 줄 게 없어서. 김서방 하고 맛있게 먹어"

"네 엄마 오늘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물김치 하고 지금까지 서있는 거야. 아빠가 재료 다 다듬어줬어."



친정 간다고 가벼운 마음에 빈 반찬통만 쫄래쫄래 들고 온 마흔 넘은 철부지 딸이 이렇게 못나 보이긴 처음이다. 화는 철없는 나에게 난 건데, 괜스레 엄마한테 날 선 말로 마음의 화살을 쏘아댄다.


"왜 시키지도 않는 걸 하는 거야? 그냥 이런 날에는 좀 쉬라니까 말 진짜 안 듣네!"

"네가 평소에 자주 와봐, 내가 이렇게 하겠니? 자주 좀 오라니까 오지도 않고, 운전은 도대체 왜 안 배우는 거야? 돈 준다고 해도 왜 안 해?"

"애는 누가 봐? 애를 좀 봐주면서 그런 소리 좀 해. 내가 놀아?"

"누군 놀면서 면허 따? 네가 할 마음이 없는 거지. 운전 못하는 바보는 너뿐이야."


상대방의 허점을 잘 알고 있는 부녀는 서로에게 독이 될 화살촉을 골라 심장에 제대로 명중시킨다. 딸은 애를 봐주지 못하는 친정엄마의 미안한 마음을 겨냥해 찌르다 못해 후벼 팠고, 친정 엄마는 평소 거북이 같은 딸의 실행력이 답답했던 차에 제대로 내지르셨다. 패자만 남는 무모한 싸움에 고래 등이 터지는 건 남자들뿐이다. 친정아빠는 아이들을 친정엄마에게 보내면서 화제 돌리기에 바빴고, 남편은 장모님이 만든 반찬들을 맛보며 마음 풀어드리느라 안절부절이다.

어린이날 겸 어버이날 겸 둘째 생일 식사는 남자들의 노력 덕분에 평화롭게 끝이 나고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됐다. 아까 만들어 놓은 반찬통을 차곡차곡 쌓아놓고도 뭘 더 줄게 없나 냉장고를 이리저리 뒤지는 친정엄마의 뒷모습이 애잔하다. 나 같으면 괘씸해서 챙겨주기도 싫겠고만 집 곳간을 다 털어줄 기세다.


"지난번에 시켜준 김 다 먹었니? 얼마나 남았어?"

"아직 있어. 안 줘도 돼."

"김 떨어지면 얘기해, 또 시켜줄게."


자식이 매몰차게 쏘아대도 어쩔 수 없는 게 부모 마음인가 보다. 가져왔던 빈 반찬통 고대로 다시 채워져 우리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외갓집에 온 아이들을 위해 마트에 들러 간식거리까지 챙겨주신다. 외갓집 가는 날은 엄마 아빠 눈치 안 보고 마음껏 카트에 과자를 담을 수 있어 아이들이 오매불망 기다리는 마지막 코스다. 애들도 못 봐주는데 간식비 부담이라도 덜어주려는 부모님의 마음이다. 이삿짐을 방불케 하는 양의 박스와 쇼핑백들을 승용차 안에 가득 싣고 친정 부모님의 배웅을 받고 떠난다.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고 서 있는 두 분의 모습에서 자식의 사랑을 또 한 번 느낀다.


다음날 엄마한테서 톡이 온다.


"얘, 물김치는 뽀글뽀글 기포 올라오면 얼른 김치 냉장고에 넣어야 해. 시원하게 해서 밥맛 없을 때 국수에 말아먹어. 끼니 거르지 말고."


김치냉장고에 넣기 전 뚜껑을 열어보니 거품처럼 하얀 기포들이 살아 숨 쉬듯 움직인다. 내가 좋아하는 오이가 듬뿍 들어갔고 색감 낸다고 빨강, 노랑 파프리카까지 채 썰어 넣은 정성에 엄마의 사랑이 느껴진다. 얼른 숟가락을 꺼내 국물을 맛본다. 십여 년 전, 결혼식 날짜를 잡고 앞으로 자주 먹을 수 없겠다고 슬퍼했던 소중한 엄마의 손맛이 재현되는 순간이었다.




며칠 뒤, 오늘은 기필코 엄마가 해준 물김치에 국수를 말아먹으려고 불필요한 약속을 잡지 않았다. 팔팔 끓고 있는 냄비에 분홍색 천연초 국수를 부채꼴로 촤르륵 펼친다. 물김치의 하얀 배추, 초록 오이, 노랑 빨강의 파프리카가 분홍색 국수와 함께 한 그릇 안에 담아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맛이 기대된다. 평상시에는 대충 덜어 먹는 반찬도 오늘은 예쁜 접시에 구색을 갖추는 정성을 들인다. 친정엄마가 딸을 생각하며 만든 귀한 마음을 생각하니 막 담을 수가 없었다. 찬물로 샤워를 끝낸 분홍빛 국수 위에 물김치를 국자로 떠서 흠뻑 적셔준다. 입맛이 없던 찰나에 엄마의 반찬이 식욕을 자극한다. 한참 신나게 먹다가 마음이 급 아려진다. 칠순을 바라보는 친정엄마의 손맛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나에게 얼마나 허락돼 있을까 생각하니 물에 젖은 건 국수뿐이 아니었다. 코끝 찡하게 눈물 나는 국수를 배불리 먹고 친정엄마에게 잘 먹은 인증사진을 보낸다. 따듯한 말 한마디 대신 반성과 고마움의 표현이랄까. 값비싼 보석이나 명품백보다도 귀한 우리 엄마의 사랑을 오래도록 받고 싶어 시간을 자꾸만 멈추고 싶다.


"사랑하는 딸, 맛있게 먹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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