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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세영 Feb 01. 2024

잠옷연대기] 고작 여섯살이었다

 내가 고른 것인지 엄마가 사준것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 기억 속 첫 잠옷은 분명 치마 잠옷이었다. 당시 여자 아이들이라면 한번쯤 그려 봤을 법한 공주 드레스처럼 어깨에 퍼프가 퐁실퐁실하게 들어가있었다. 소매 부분은는 연한 분홍 체크 무늬로 되어 있고, 가슴팍에는 풍선 든 고양이가 그려진 잠옷이었다. 그 잠옷을 입은 날이면 너무나도 기분이 좋아 마치 내가 동화 속 공주님이 된 듯 했다.


그 날도 어여쁜 공주 잠옷을 입고 한껏 기분이 좋아 있었다. 무릎 정도 오는 기장이 어린 내 생각에 공주 드레스라고 치기엔 영 짧게 느껴졌는지 늘어나지도 않는 옷감을 죽죽 잡아당겨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게끔 했던 기억이 난다. 저녁놀이 저물고 엄마는 아직 혼자 잠드는 법을 모르던 한살배기 동생을 재우기 위해 방에 들어갔다. 아빠는 아직 퇴근 하지 않았고, 집안은 고요하고, 거실에는 나 홀로 있었다.


나는 한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공주님처럼 사뿐 사뿐 걸어보기도 하고, 치마 잠옷 자락을 살며시 쥐어 잡아보기도 했다. 홀로 숲속을 산책하던 공주님 역할이었나보다. 그 순간 시계 초침 소리는 산새의 지저귐으로 바뀌었고, 형광등 불빛은 나뭇잎 사이 흔들리는 햇살로 보였다. 거실을 한바퀴 산책 한 후 상기된 나는 부쩍 더워진 날씨탓을 하며 작은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 때 마침 저어쪽에서 맑은 샘소리가 들려왔다. 빨래 걸이 밑 바위틈에서 샘물이 퐁퐁 솟아나고 있었다.


홀로 하는 산책길이지만 나는 공주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우아한 걸음걸이로 빨래걸이, 아니 바위 틈 샘물로 다가갔다. 샘에 도착해 나는 치마를 곱게 채비 해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치마 끝 짧은 레이스가 예쁜 모양이 되도록 펼친 뒤에야 나는 샘물을 떠 마실 수 있었다. 그렇게 두어번 마시던 순간 뒤에서 단조로운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하니?"


심장이 떨어질 뻔 한다는 느낌을 받은 나는 이내 곧 수치스러워졌다. 고된 산책의 여파가 아닌 부끄러움과 당황의 열기가 온 몸을 감쌌다. 나는 고작 6살이었다.


당시 나의 행동은 어린 아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상상 놀이였을 뿐이다. 엄마도 딸아이가 빨래 건조대 아래 기어들어가 웅크리고 있으니 순수하게 궁금한 마음에 내게 뭐 하냐 물어봤던 것일테다. 하지만 나이에 비해 조숙했고, 언제나 어른스럽다는 말을 들어왔던 나는 내 상상놀이를 들킨 것이 참으로 창피했다. 공주 잠옷 한벌에 언니답지 못한 행동을 했다는 생각에 아무것도 아니라며 얼버무렸다. 그 뒤로 나는 공주 잠옷을 입어도 상상놀이를 하지 않았다. 공주님처럼 행동하는 것이 창피한 것이라는 생각이 박힌 순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내 안의 공주를 들키지 않기 위해 덧문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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