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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세영 Feb 14. 2024

잠옷 연대기]비단 잠옷만 그런게 아니었다

노란 책가방, 갈색 샌들 그리고 빨간 에나멜 구두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우리 부모님은 참으로 내 취향을 인정해 주지 않았다. 물론 더 좋은것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셨겠지만 어린 나에게도 취향이라는게 있었다. 연필 하나를 사더라도 분홍색에 레이스 달린 공주 취향임을 은근히 알렸지만 부모님께선 대쪽같이 제일 좋은(그리고 디자인이 구린) 것을 내게 건네주었다.


수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초등학교 입학 준비를 할 때 였다. 유치원 졸업을 마치고 어엿한 초등학생이 된다는 설렘에 하루 하루가 들뜬 나날이었다. 학교 입학 전에 한글은 다 떼야 한다, 입학 전에 구구단을 외우고 들어가야 한다는 등의 쏟아지는 엄마의 등쌀도 그저 즐거웠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은 나를 데리고 동네 대형 마트로 향했다. 그 곳에는 입학을 앞둔 학생들을 위한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학용품부터 알록달록한 책가방까지 아주 별천지였다.


별천지에서 공책도 왕창 사고 연필도 사고 분홍색의 필통도 샀다. 이제 대망의 책가방을 고를 차례였다. 나는 대번에 공주가 그려진 에나멜 소재의 가방에 눈길이 갔다. 당시 유행하던 캐릭터들이 그려진 책가방도 있었다. 책가방 위에 그려진 그림은 다 제각각이었지만 내 눈길을 사로 잡은 모든 책가방들은 분홍색이었다. 분홍색이라고 해서 색이 하나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분홍색에도 여러 베리에이션이 있으니 나에겐 하나 하나가 다 매력 넘치는 색이었고, 그 색들 중에 단 하나만을 골라야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7살 인생 살이 중 최대 난관, 고뇌에 빠진 그 순간 아빠가 저 편에서부터 가방을 하나 들고 왔다. 노란색이었다.


가방은 분홍색도 아니었고, 공주 그림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내 취향과 고민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 첫 책가방은 아빠가 골라온 노란색 휠라 책가방이 되었다. 나는 내 고집을 끝까지 밀어붙일줄도, 내 취향을 내세울줄도 몰랐으니까. 그저 엄마 아빠 말을 잘 듣는 점잖고 착한 그런 딸이었으니까.


그렇게 노란 책가방을 메고 입학한 후 나는 깨달았다. 1학년 5반 43명 중 분홍과 파랑이 아닌 책가방을 멘 학생은 한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적다는 걸.




1학년 1학기가 끝나갈 무렵, 부모님은 내게 새 샌들이 필요하다고 생각 하셨다. 같은 반에 있던 한 친구는 늘 분홍 책가방과 분홍 치마 그리고 빨간 구두 신고 다녔다. 나도 저 애처럼 분홍색이 가득한 옷차림으로 공주처럼 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그런 와중에 새 신발이라니. 이번에야 말로 나도 분홍색 신발을 갖겠노라 다짐을 하고 마트로 향했다.


분홍색, 글리터, 리본, 꽃, 그리고 에나멜까지 모든 샌들을 지나쳐 내 두 발에는 갈색 소가죽 샌들이 자리했다. 발등을 다 뒤덮는 투박한 디자인에 가죽 본연의 색인 차분한 갈색, 그리고 찍찍이가 아닌 고무줄 처리 되어 있는 마감까지. 어느 한 구석 내 맘에 드는 곳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내 발에는 이 못생기고 질 좋은 비싼 샌들이 신켜져 있었다. 부모님의 갈색 샌들에 대한 부모님의 열정적인 브리핑을 외면 할 수 없었다. 엄마 아빠가 좋다고 하는 것을 신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비록 내가 꿈꾸던 신발이 아닐지라도. 그렇게 나는 공주와 또 한걸음 멀어졌다. 그리고 내 작고 예쁜 빨간 구두가 생각났다.



샌들을 사기 전, 아직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이전의 일이다. 어느날 차를 타고 가더니 신발 가게 앞에 정차 했다. 그 날은 내가 선물을 받는 날이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신발을 사주겠다니 신이 났다. 아마 부모님이 새 신발이 필요했던 터라 겸사 겸사 내 것까지 사주셨던게 아닐까. 부모님께서 신발을 고르시는 동안 나는 반짝 반짝 윤이 나는 아동용 구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쩜 저렇게 빛이 날까 싶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살짝쿵 만져보기도 했다. 여러 색 중에 그 날 내 눈을 사로 잡은건 빨간색 에나멜 구두였다. 위에 장식이 무슨 모양이었는지는 자세히 기억 나지 않지만 그 빨간색만큼은 눈에 선명하다. 이걸 신으면 나도 동화 속 주인공처럼 춤도 잘 추고 멋진 왕자님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의 신발 고르기가 끝나고 이제 내 차례가 돌아왔다. 나는 수줍게 내가 선택한 신발을 가리켰다. 하지만 부모님은 역시나 반대. 검정색의 무난한 디자인의 신발을 손에 쥐고 내게 내밀었다. 하지만 그 날 따라 나는 무슨 고집이었는지 부득불 우겨서 그 빨간 구두를 쟁취해 냈다.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안준다는 말도 안 통했고, 언니는 이런거 신는거 아니라는 부모님의 말도 안통했다.


심지어 딱 맞는 사이즈로 구매했다. 그리고선 나는 이 신발을 신지 못했다. 너무 소중한 나머지 기스라도 날까봐 수건으로 잘 싸메어 박스에 고이 담아 책상 밑에 꽁꽁 숨켜두고 어쩌다 한번씩 꺼내어 집안에서 신어보는 정도로 만족했다. 집안에서 신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름질까 걱정되는 마음에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이런 날 보며 부모님은 배꼽을 잡고 웃곤 했다. 그 덕에 나는 더더욱 이 신발을 신기가 꺼려졌다. 어린 내게도 들리는 명백한 조롱의 말투가 나를 위축시켰다.


그렇게 아끼던 빨간 구두는 성장기 어린이의 동심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채 작아져만 갔다. 발을 구겨 넣어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작아졌음에도 나는 이 신발을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었다. 내가 가진 가장 예쁜 물건이어서였다.



나는 빨간 구두를 생각하며 부모님의 선택에 응했다. 나는 빨갛고 반짝이고 예쁜 구두가 있으니, 그리고 그 조롱의 말을 또 다시 들을 용기가 없었으니 그냥 부모님이 선택한 투박한 갈색 구두를 신겠노라 말했다(물론 앞의 이야기는 속에 담아두고 그냥 엄마가 골라준거 신겠다고 했다).


내 안에 있던 공주님에게 덧문을 씌우고 빗장을 걸어잠구었다. 그래야 착한 어린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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