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살, 내가 장애인이 되던 해
최근에 책상을 정리하다가 서류 한 장을 발견했다. '심신장애자 진단서'라는 케케묵은 공문서였다. 이 문서는 요즈음으로 치면 '장애인 진단서'에 해당한다. 장애인 등록을 하기 위해 필요한 옛 서류였던 셈이다.
장애와 관련하여 발급받은 최초의 이 진단서는 내가 어디로 이사를 가든 자동으로 동주민센터에 이송된다고 한다. 내가 어떤 이유로 언제부터 장애인이 되었는지 따위가 행정기관에 기록되고 평생토록 나를 따라다니는 것이다. 보통은 현재의 장애 상태가 중요하므로 그때그때 병원에 가서 장애인 진단서를 발급받으면 되지만, 아주 가끔은 최초의 장애인 진단서를 요구하는 기관(예컨대 보험사)이 있는데 이럴 때는 거주하는 동주민센터에 방문하여 진단서를 발급받을 수 있다.
구석기시대의 유물을 뜯어보듯 찬찬히 진단서를 살펴보았다(아내가 읽어 주었다). 질병 및 외상명, 장애 상태 등이 기록되어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평이한 내용들이었다. 이름뿐만 아니라 내용까지 케케묵은 서류였다. 최초의 진단서라는 그나마의 타이틀(?)이 없었다면 굳이 살펴볼 필요도 없을 듯했다.
정작 나를 멈칫하게 한 건 진단서의 내용이 아니었다. 서류가 발급된 연도였다. 1992년 03월 25일. 내가 여덟 살이 되던 해의 봄에 진단서가 발급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네가 정식으로 장애인이 된 건 여덟 살 때였네. 너무 늦은 거 아니야?"
아내의 말이 의미심장했다. 아닌 게 아니라 나 역시 순간적으로 정체감의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아! 내 병명은 선천성 녹내장인데, 그래서 태어날 때부터 거의 뵈는 게 없었는데, 누가 뭐래도 나는 오리지널 선천성 중증 장애인인 줄 알았는데! 여덟 살이라니, 여덟 살이라니. 조금 과장하면 지금껏 발 딛고 있던 세계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그러면서 나는 1992년의 봄을 상상했다. 고작 03월이었으니 아직은 쌀쌀했겠지. 엄마 손에 이끌려 병원에 들어갔을 거야. 그때 너는 비장애인이었어.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말이야. 어린 너는 잘 모르겠지만 너, 지금 다리 하나를 건너고 있어. 짧은 다리를 다 건너는 순간 새로운 풍경이 펼쳐질 거야. 결코 이전의 세계로는 돌아갈 수 없어. 왜냐고? 네가 건너온 다리는 이미 불타오른 뒤일 테니까.
그렇게 해서 나는 비공식적으로는 태어나면서부터, 그리고 공식적으로는 여덟 살이 되던 해에 시각장애인이 되었다. 당연하게도 한번 불타버린 다리는 복구되지 못했고 장애인으로서의 삶이 일관되게 펼쳐졌다.
스토리텔링의 여러 법칙 중 수위를 차지하는 제1 법칙이 있다. '다리를 불태워서 주인공이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할 것!'이 바로 그것이다. 모든 이야기(소설, 영화, 드라마 등)에서 주인공들은 모종의 이유 때문에 이전의 안락하던 삶으로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되고 새로운 현실을 마주하여 그 무엇과 갈등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갈등.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이야기의 묘미 아닐까?
인생이 하나의 이야기라면, 마땅히 우리들 삶에도 불타버린 다리가 몇 개쯤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불타는 다리를 건너와 버린 건 아닐까.
그러고 보면, 나는 종종 인생의 분수령 앞에서 되뇌었다. '아, 나는 이제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겠구나. 또 하나의 다리가 불타오르겠구나. 다시는 저쪽으로 건너갈 수 없겠구나.' 혼인신고를 하기 위해 들른 구청에서, 혹은 발령장을 수령하러 간 교육청에서, 또는 계약 차 방문한 출판사 앞에서 머뭇대며 되뇌었다. 어쩌면 그때 나는 장차 닥쳐올 갈등과 투쟁의 징조를 바람결에 냄새 맡았던 건 아닐까.
앞으로도 수없이 많은 다리가 불타고 그 앞에서 나는 운명 같은 징조를 온몸으로 느끼며 휘청이겠지만, 바라건대 내 의지로 앞으로만 걸어 나아가기를 소망한다. 갈등과 투쟁을 피해 뒷걸음질 치지 않기를, 불타오르는 다리로 뛰어들지 않기를, 감사하며 기꺼이 갈등하기를 바란다. 기꺼운 갈등.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묘미가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