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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young Apr 15. 2019

여전히 성장 중...

Rainbow (우리는 싸우며 성장한다.)

인간은 동물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이 동물과 다른 이유는 학창 시절부터 수없이 배워왔고 들어왔던 대로 이성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지능을 가진 두뇌로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있고 옳고 그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인고로 다른 동물들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놈의 이성이라는 것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수없는 갈등과 반목을 저지르면서 살아간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싸움의 역사는 언제부터일까? 이 문제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마도 거의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는 생각이라는 것을 했고 그리고 그러면서 싸움을 시작하지 않았나 싶다. 그 이유는 우리는 본능적으로 부모님께 더 사랑받기 위해 그리고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주변인들과 끊임없는 갈등 속에 있어왔던 거 같기 때문이다. 

나는 많은 형제 속에서 성장했다. 애매한 위치 속에서 위로는 채이고 아래로부터는 부대끼면서 그렇게 수많은 갈등을 겪으면서 자라났다. 그러다 보니 어렸을 적에는 그다지 집안에서 목소리를 내지 않았었고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던 소심한 아이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언니들에게 함부로 대들 수도 그렇다고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에게(엄마에게는 이 세상 가장 큰 보물이었다. 남동생은.) 누나 노릇할 수도 없었던 그런 위치였기에 나는 무조건 참고 견디면서 그렇게 가족 속에서는 살짝 아웃사이더로 지내왔던 것이다.(벗뜨, 이 주변인 시점이 가장 강력한 것이라는 것은 성인이 되고 나서야 깨닫는다. 가족의 역사를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기에 치부책은 나에게 있다...)

나에겐 위로 네 명의 언니가 있다. 그리고 그 네 명의 언니들은 다들 자라서 가정을 꾸미고 각자의 삶을 시작할 때 까지도 끊임없이 싸우고 화해하기를 반복하며 수많은 전투와 휴전을 겪어왔다.(물론 지금도 만나면 또 싸운다. 우리는... 그러니까 피를 나눈 형제이지.) 특히 나는 셋째 언니와 넷째 언니의 싸움을 숱하게 봐왔다. 그리고 이따금씩 나와 셋째 언니 그리고 나와 넷째 언니의 싸움이 일어나곤 했었다.

가끔 남자분들이 남자 형제들은 피를 보고 싸운다고 그런 이야기를 할 때 사실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피를 보는 건 남자 형제들뿐이 아니라고. 여자 형제들도 유혈사태를 많이 일으킨다고 그렇게 마음속으로 조용히 외쳐본다.

셋째 언니, 넷째 언니 그리고 나는 신체에 자잘한 상처들이 남아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다 싸움의 자랑스러운 훈장들이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자매들 싸움처럼 누가 옷을 몰래 입고 나갔다가 들켜서 싸운다거나 서로 이쁜 물건을 차지하겠다고 싸우진 않았다. 희한하게도 좋아하는 스타일이며 신체 사이즈도 다 달랐기에 그런 일로 싸울 일은 드물었다. 우리의 싸움은 정말 사소한 것들이었다. 그저 놀다가 혹은 같이 방에 가만히 있다가 불쑥불쑥 싸우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딱히 이유도 없었다. 그저 우리는 자매라는 이유로 그리고 고만고만한 나이였다는 이유로 그렇게 서로 치고받고 싸웠던 것이다.

넷째 언니의 왼쪽 뺨에는 상처가 하나 있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 사람들이 오해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상처는 셋째 언니의 흔적이다. 어린 시절 언니들은 엄마가 외출한 사이에 엄마의 물건을(그 당시 엄마께서는 집에서 부업을 하고 계셨고 그 물건은 바로 엄마가 하시던 부업 재료라고 했다.) 가지고 놀다가 싸움이 일어났고 그 투닥거림 속에 그만 셋째 언니가 넷째 언니의 얼굴을 그어버린 것이다.(당연히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고 실수였다.) 그렇게 그 싸움의 흔적은 우리에게 아직도 남아있게 된 것이다. 어디 그 두 언니의 싸움이 그뿐이겠는가.. 정말로 엄청 많았다.(여기서 다 쓰면 장편 하나 쓴다. 고로 이쯤에서 컷!!)

나 또한 얼굴에 그리고 손에 상처가 남아있다. 그런데 나는 힘없었던 애매한 아이였기에 싸움으로 인한 상처라기보다는 일방적인 다굴의 상처라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얼굴의 상처는(지금은 아주 자세히 봐야 보인다. 이거 뭐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도 아니고.. 흥!) 어린 시절 넷째 언니가 나를 인형 다루듯이 데리고 놀다가 살짝 거부반응을 보인 나를 그만 손톱깎기로 입술 아래를 찝어 버렸다. 그리고 그 상처는 여전히 나의 아랫입술 아래 살포시 남아있다. 이렇듯 우리는 숱하게 싸우면서 그리고 서로에게 수많은 상처들을 남기며 성장했고 그리고 지금의 우리가 되었다.

나는 가끔 주변 친구들의 자녀들이 투닥거리는 것을 볼 때 우리의 어린 시절 투닥거림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투닥거리는 아이들의 부모가 아이들을 말리려고 할 때 나는 그저 내버려두라고 얘기하곤 한다.(심한 폭력이 아니라면 말이다. 심한 싸움은 당연히 나도 당장 말린다.) 그 이유는 우리는(동물 중에서도 이성을 가진 우리 인간들은) 모두 그렇게 싸우면서 성장하기(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기)때문이다.

한때 나의 얼굴의 상처를 그리고 손에 남은 상처를 지워야 하나 하고 생각했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생각해본다.  나중에 내가 더 나이가 들어 언니들과 모여 지난날을 얘기하게 될 때 그 상처들이 우리의 추억이고 우리의 철부지 시절을 떠올려 줄 수 있는 흔적이 될 것이기에 그렇게 그저 그 상처들을 남겨두기로 한다. 그 흔적들이 반으로 쪼갠 목걸이 조각처럼 우리가 형제들이라는 것을 증명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도 한다. 그건 바로 우리가 다른 동물들과는 다르게 생각이라는 것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을 할 줄 알고 또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알아야 하며 각자의 욕망과 꿈을 가진 그런 인간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우리는 수많은 싸움을 해왔으며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서로 만나면 싸우고 화해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러면서 우리는 자라나고 성숙해 간다.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남아있는 상처는 처음 만들어졌을 때처럼 선명하지도 그렇다고 우리를 아프게 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그 아픈 상처를 보듬고 살아왔으며 그리고 그 상처가 희미해지는 그 과정 속에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자라난 그런 어른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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