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young May 02. 2019

여전히 성장 중...

Whiteness (...to my grandmothers)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항상 식사를 하기 전, 물부터 찾았다. 늘 밥보다 물로 식사를 시작하는 일은 내가 아주 아기였을 때부터 시작된 습관이었다. 식사 중에도 틈틈이 물을 마셔야 하며 물이 없다면 심지어 커피나 음료와 함께 식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나의 습관은 우리 외할머니 덕분이다. 아주 어린 시절 외할머니랑 잠깐 함께 살았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당시, 엄마께서 작은 동네슈퍼를 인수받아 일을 하시기 시작하셔서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서 함께 사시게 되었고 우리들을 돌봐주셨던 것이다.(그런 줄로 알았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와중에도 나의 머릿속에서 명확하게 떠오르는(지금도 아름다운 그림처럼 아련하게 떠오르는 장면입니다.) 모습이 있다. 동그랗고 조그마한 밥상을 두고 나와 외할머니 그리고 옆집 할머니 이렇게 셋이 앉아있다. 그 밥상 위에는 스테인리스(사실, 저는 스댕이 익숙합니다.) 국그릇이 항상 놓여있는데 그건 물을 가득 담아 놓은 물대접이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숟가락 가득 물을 담아서 나에게 먹여주시고는 그 다음으로 밥과 반찬을 넣어주셨다. 그 순서는 매 끼니마다 반복되었고 어느덧 습관이 되어 물을 마시지 않으면 밥을 먹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할머니께서는 어린 손녀딸이 소화가 잘 되라고, 그리고 반찬이라고는 김치가 대부분인 밥상에서 어린 손녀의 속을 달래준다는 이유로 물을 그렇게나 먹이셨던 것이다.

나는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전무하다. 외할머니는 내가 5살이 되기도 전에 돌아가셨는데 내가 생각해도 참 이상한 일은 그렇게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외할머니와의 밥상머리 기억이 너무 또렷하게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신기하기도 그리고 아쉬운 마음이기도 하다. 나중에 나이가 들어 엄마께 들은 바로는 외할머니가 우리를 돌봐주시기 위해 우리 집으로 오셨다기보다는 연로한 할머니가 치매 증상이 생기셨고 시골에 홀로 계실 수가 없어서 우리 집으로 오신 거였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를 듣는 중, 외할머니에 대한 또 다른 기억이 하나 떠오르게 되었다. 

우리 식구가 막 큰집으로 이사를 했던 바로 그 시절이었을 것이다.(그래서 하숙생들을 받았죠.) 겉보기엔 대궐처럼 큰 기와집이었으나 워낙 오래된 집이라 이곳저곳, 망가진 곳이 많았었고 아빠께서는 손수 집안 곳곳의 수리를 하시기 시작하셨다. 화장실도 옛날식이라 땅에 구멍을 파놓은 전통적인 재래식 화장실이었는데 아빠께서는 그 화장실조차도 새로 장판을 깔으셨으며 도배까지 깔끔히 하셨다. (언니들은 화장실은 그래도 화장실이라며 아빠를 말렸다고 하던데... 우리 아빠는 언제나 그런 사소한 것들도 꾸미시는 걸 좋아하셨다.)

문제는 우리 외할머니였다. 치매 증상이 날로 늘어가던 할머니가 말끔한 화장실을 늘 방으로 착각을 하셨던 것이다. 잘 계시던 할머니가 갑자기 안 보이면 나를 돌봐주시던 옆집 할머니가 나를 업고는 할머니를 찾아다녔고 그러다 화장실로 가보면 문밖에 늘 할머니의 하얀 고무신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그리고 문을 열어보면 할머니는 화장실에서 누워 주무시곤 했던 것이다.(화장실로(덩 구멍으로) 빠지시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지.)

우리 할머니는 아빠를 아저씨라고 부르곤 하셨는데, 엄마가 밤이 되어 집에 돌아오시면 할머니는 엄마께 "저 아저씨가 방에(화장실) 못 들어가게 한다. 저 아저씨가 나를 막 아프게 때를 빡빡 밀었다." 이러시면서 엄마께 어린아이처럼 고자질을 하셨다. 그런 아기 같은 할머니와 아빠, 엄마 앞에서 역시 아기였던 나는 옆집 할머니에게 안겨 그저 그런 할머니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곤 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 외할머니는 나와 다를 바 없었던 아기의 모습으로 나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고 계신다. 

내가 수험생이었던 고3 시절,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아침에 학교를 갈 때까지만 해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던 엄마께서는 밤이 되어 하교할 때가 되자 나를 집이 아닌 둘째 언니네 집으로 보내셨다. 그리고 나는 시험이 끝나는 날이 되어서야 집으로 갈 수 있었다.

우리 친할머니는 우리 엄마께는 참으로 가혹한 시어머니였고 우리에겐 작은 아빠와 작은 엄마, 그리고 사촌들만 사랑하셨던 야속한 할머니였다. 건강하셨을 때는 우리 집에는 명절 때나 특별한 날에만 오셨었고 우리는 잘 안아주시지도 않았지만 사촌동생들에게는 한없이 너그럽고 자상한 할머니였다.(우리 아버지가 장남인데 할머니는 왜 작은아버지를 더 사랑하셨을까나? 하긴, 장남이 우선이라는 건 어쩌면 편견이니, 우리 할머니는 깨어계신 분이었던 것인가?...) 그러다 보니 명절 때가 되면 우리 엄마나 우리들은 음식 준비에, 여러 가지 일에 늘 바쁘게 움직였지만 작은집 식구들은 느지막이 와서는 엄마와 우리가 열심히 준비한 것들을 그저 당연한 듯 받아 가곤 했었다. 그러나 우리 엄마는 할머니가 무서워서 제대로 큰소리를 내지도, 그렇다고 손아래 동서에게 맘대로 일을 시키시지도 못하셨다. 어린 시절, 나는 이 모든 일들이 너무나 부당하고 억울했었기에 할머니가 너무 미웠으며 덩달아 작은집 식구들로 미워했었다.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할머니는 갑작스레 중풍으로 쓰러지게 되셨고 그렇게 절대 오고 싶어 하시지 않던, 우리 집으로 오시게 되었다. 몸이 불편하셔서 방에서조차 나오실 수 없으시면서도 할머니의 성격은 하나도 수그러들지 않았고 우리 집에 계시던 내내 작은집으로 보내달라며 엄마를 달달 볶곤 하셨다. 나는 끼니때마다 할머니방으로 엄마께서 차려주신 밥상을 가져다 드리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할머니께 붙들려 끊임없이 엄마에 대한 할머니의 불평들과 딸만 그득한 우리 집에(우리들에) 대한 할머니의 넋두리들을 들어야만 했다. 그러면서 나는 생각했다. '왜 우리 엄마, 아빠는 이런 할머니를 모시고 계시는 걸까? 우리들을 이렇게나 싫어하시는데.. 그냥 작은집으로 모시면 엄마도 우리도 편할 텐데, 그렇게나 이뻐하시는 작은집 식구들이 할머니를 모셔야 하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닌가.'라고 말이다.

그러나 몸만 불편하셨지 여전하시던 할머니도 한해 한 해가 지나면서 조금씩 약해지고 계셨다. 고래고래 지르시던 소리도 나날이 작아지셨고 반찬이 맘에 안 든다며 밥상을 무르기가 일상이었던 그런 날도 하루하루 조용히 넘어가기도 했다. 나에게 퍼붓곤 하셨던 엄마에 대한 원망과 불평도 점점 없어지셨으며 우리들도(손녀딸들도) 미묘하지만 조금 이뻐하시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변하지 않은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작은집으로 보내달라고 애원하시 일이었다. 가끔 할머니를 뵈러 오시던 작은 엄마가 등장하시면 할머니는 작은 엄마를 붙들고는 본인을 데려가라며 하소연을 하셨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엄마의 쓸쓸한 모습이 아직도 기억 속에 선하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작은 아빠와 작은 엄마를 부르시고는 할머니를 모셔가라고 말씀하셨다. 작은 엄마께서 극구 반대하셨지만 엄마는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인데 그거 하나 못 들어주냐며 작은 아빠를 혼내셨고 그렇게 작은 집 식구들은 할머니를 모시고 가게 되었다. 그러나 정확하게 할머니는 일주일 만에 우리 집으로 다시 오시고야 말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작은집에서 돌아오신 할머니는 어느 누구에게도 작은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엄마도 아빠도 할머니께 아무것도 여쭤보지 않으셨고 그저 조용히 할머니를 다시 받아들였다. 다시 늘 똑같은 하루하루가 시작되었지만 무언가가 달라졌음을 나는 느끼고 있었다. 할머니의 말수가 없어지셨으며 할머니는 더욱더 쇠약해지고 계셨다. 엄마가 해주시는 음식을 말없이 드셨으며 아빠가 시켜드리는 목욕도 말없이 받으셨다. 내가 밥상을 갖다 드려도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고 그저 묵묵히 밥을 드시고는 밥상을 물리셨다. 궁금해진 내가 "할머니! 작은집에 또 안 가셔?"라고 하자 할머니는 "절대 안 간다. 여기서 살다 죽을란다."라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그 후, 몇 개월이 지나자 할머니는 식사도 하지 못하시게 되었고 할머니의 방문은 쉬이 열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내가 중간고사를 시작한 그날, 할머니는 우리 곁을 떠나시고 말았다. 할머니가 떠나시던 날 아침, 나는 집안에 드리운 무거운 분위기를 느꼈었지만 시험에 신경 쓰느라 그저 모른 체하고 학교를 갔었다. 그리고 학교가 끝나서 둘째 언니와 형부가 나를 데리러 왔을 때 그저 할머니의 죽음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언니네 집으로 향했다. 눈물이 나지도 딱히 슬프지도 않았다. 나는 할머니를 미워했었으니까.. 할머니도 나를 미워하셨으니까.. 우리 둘 사이에는 이렇다 할 정도 사랑도 없으니까 아무렇지도 않았다.(역시,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리고 할머니와 우리 가족이 마지막 인사를 하던 날, 학교의 시험도 다 끝이 났고 나는 시험이 끝나자마자 담임선생님을 찾아갔다. 그리고 선생님께 조퇴를 말씀드렸고 선생님께서 이유를 물으셨다.

"사실은, 할머니가 월요일에 돌아가셨는데요. 시험기간이라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오늘이 발인이라 가봐야 할거 같아서요." 그러자 선생님께서 놀라신 듯 잠깐 뜸을 들이시고는 말씀하셨다.

"그랬구나. 심란해서 시험도 제대로 못 봤겠구나. 선생님이 미안하다."

그리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선생님의 말씀을 곱씹어 보았다. '내가 심란했었나?' 그리고 그 생각을 하자마자 눈물이 나왔다. 언제나 집으로 가면 할머니가 강력한 존재감을 뿜으시며 방에 계셨는데 이제 할머니의 방은 텅 비어 있다. 아침마다 밥을 주지 않는다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시던 할머니의 목소리도 내일부터는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무언가 속에서 빠져나가는 느낌이었고 집에 들어가기가 무서워졌다. 그리고 그렇게 미워하던 할머니가 갑자기 보고 싶어 졌다.  

나의 기억 속에는 두 할머니가 살고 계신다. 한 분은 아기의 모습으로, 그리고 또 한 분은 고약한 모습으로 남아 계신다. 우리를(손녀, 손자들을) 사랑하셨는지 아닌지는 이제와 생각해보니 딱히 중요한 것은 아니었던 거 같다. 나의 기억 속에 할머니들은 어린아이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으니...(한 분은 순진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또 한 분은 미운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우리를 사랑했냐 아니냐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분들이 아니라 우리가(우리 자녀들이) 아이가 되어버린 할머니(어르신)들을 사랑했어야 하는 것이 맞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혹, 지금 어딘가에서 우리 할머니들이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면 할머니들께 전하고 싶다. 너무 어렸기에 아무것도 몰랐던 저희(나)를 용서하시라고, 할머니들이 계셨기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으니 정말로 감사하다고, 우리도 언젠간 나이가 먹어 노인들이 될 것이고 어쩌면 할머니들보다 더 고약해질 수도 있으니 우리의 잘못을 너그러이 봐주시기를 바란다고 말이다...   

이전 19화 여전히 성장 중...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