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이 한국인이라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따져보아도 동양인들 중에서 한국인들은 꽤 빼어난 외모와 패션감각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 길을 걸어가다 보면 가는 곳곳마다 정말로 아름다운 사람들을 사방에서 만날 수 있으며, 일명 핫플레이스라고 불리는 곳을 지나가다 보면 이곳이 '영화 찰영장인가?'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쭉쭉빵빵한(모델 뺨칠 거 같은)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다. 이렇듯, 온 사방으로 아름다움에 둘러싸인 우리는 어느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에게 색을 끊임없이 덧칠하면서 그 아름다운 것들에 동화되고자 노력하게 되었으며, 잘못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아름다운 것들에(아름다운 사람들에게) 후한 점수를 주게 되었고 외모지상주의의 사회 속에서 예뻐야만 살아남는다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서서히 물들어 버리게 되었다.
어린 시절, 나는 그다지 외모에 많이 공을 들이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딸 부잣집이라는 강력한 배경을 타고났지만 외모에 신경을 쓴다거나 관심을 가지고 노력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첫째 언니는 일찍이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자주 마주칠 일이 없었고, 이전에 한 번 얘기한 적이 있듯이 둘째 언니는 늘 책에 빠져 살았으며, 나의 바로 윗 언니는 어린 시절 주변 여자아이들이 남자로 착각할 정도로 소년 미를 풍겼으니 내가 영향을 받을 조건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다만, 우리 가족의 뿌듯한 자랑이었던 셋째 언니가 있지만(화이트 편에서 언급했듯이 셋째 언니는 우리 엄마의 피땀 어린 태교의 성공작이다.) 그 언니와의 외모에 대한 갭은 상당히 차이가 많았던고로 차마 따라 할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원판불변의 법칙을 일찍 깨달았다고나 할까..) 그러다 보니 일찍이 나는 외모에서 손을 놔버렸고 그 정점을 고등학교를 가서 찍게 되었다. (아직도 잔재가 남아있다. 회복은 정녕 불가능한 것이란 말인가?)
나는 직업상 늘 십 대들을 만나고 그들과 시간을 많이 보낸다. 그리고 요즘 아이들 중에서 화장을 안 하는 아이를 찾아보기란 아주 힘든 일이 되어버렸다. 하긴, 초등학교 앞에서도 화장품을 팔고(초딩들이 나보다 비싼 명품 화장품 쓰더라...) 중고등학생들이 나보다 아이라인을 더 잘 그리며 남자아이들조차도 나보다 피부결이 더 고은걸 보게 되는 일이 이제는 전혀 낯설지 않은 일상이 되어버렸다. 나의 중고등 시절에는 화장을 조금만 해도 교무실에 불려 가고 집에서 쫓겨나며 친구들에게도 수군거림을 들었었지만 요즘엔 너도나도 할 거 없이 화장을 하다 보니 이제 나도 화장한 십 대들이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오히려 너무 이쁘게 보이는) 그런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나의 첫 화장은 꽤나 늦게 시작되었다. 보통 대학교를 기점으로 다들 화장을 시작하지만 나는 그보다도 훨씬 늦은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화장을 시작했다. 뭔 자신감인지(뭣도 모르면 용감해지는 법이지.) 그 나이 때까지 맨얼굴로 활보하고 다녔으며 화장품은 일도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주변에서 슬슬 권고사항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으며(말이 좋아 권고지 사실 경고였던 거지..) 친절하게 화장품까지 손에 쥐어주며 화장술을 직접 가르쳐주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조금씩, 능숙하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 어색하지 않은 정도로까지 화장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나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화장을 안 하는 날보다 화장을 하는 날이 훨씬 많아져 버렸다. 그리고 나이가 한 살 한 살 더 먹으면서(꽃다운 나이는 훨씬 지나버린), 요즘은 화장 없이는 쉬이 나다닐 수 조차 없는 상황으로까지 되어버린 것이다. 더욱이, 나는 정말 꽃 같은(꽃보다 더 예쁜) 아이들과 같이 다녀야 하는데 어찌 화장을 안 할 수 있단 말인가?
화장과 관련해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내가 가르쳤던 학생 중에 아주 남자다운 아이가 있었다.(그 아이는 현재 군인으로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꽤나 오랜 시간을 같이 했던 아이였는데(그 아이는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나와 공부를 했다.) 그 당시에도 아이답지 않게 책임감도 강하고 매너도 좋았으며 부모님께도 효자인 보기 드문 소년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농담 삼아(진심 농담이었습니다.) 그 아이에게 "선생님이 너 어른될 때까지 돈 많이 벌어놓고 기다릴게. 너는 딱 나의 이상형이야."라고 넌지시 던져보곤 했었고, 그러면 그 아이는 되도않는 소리라는 듯 "픽" 하고 실소를 남기곤 했다.
그리고 그 아이가 고3이던 어느 날이었다. 전날 심한 몸살을 앓은 내가 오후 늦은 시간까지 몸져누워있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대충 씻고 수업을 하기 위해 출근을 했었다.(당연히 화장은 못했습죠.) 그리고 학교가 끝난 그 아이, 그리고 같이 수업을 하던 다른 아이, 그렇게 두 명을 학교에서 픽업하여 학원으로 데리고 왔고 차를 주차하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후진을 하던 중, 뒤를 돌아보았고 그러다가 그 아이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는데, 그 순간, 그 아이가 진지하게 던진 말 한마디가 나의 감기몸살을 단번에 물러가게 만들었다
"선생님! 그 따구 얼굴로 저한테 시집을 오실 수 있겠어요?" (정말 '그 따구'라고 했다. 나쁜 넘..)
순간 나는 속으로 생각했었다. '우이 씨, 차를 박아버릴까?' 그리고 그렇게 나의 맨얼굴 활보는 그날로 끝을 맺게 되었다.(신기한 건 감기도 싹 물러가 버렸다. 나는 욕을 먹어야 건강해지는 체질인 건가?)
예뻐지고 싶고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은 우리 모두가 가진 바람이자 본능일 수도 있겠지만 나의 맨얼굴을(혹은 나의 진정한 모습을)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들킨다는 일은 참으로 어렵고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린 시절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리고 아무 치장 없어도 당당하게 잘 지냈으며 누군가 앞에 나서는 일도 그리 부답스럽지 않았건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의 얼굴과 몸에는 하나씩 겹이 쌓이고 여러 색을 덧입히는 일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나란 사람의(인간의) 진정한 모습도 겹이 쌓이고 색이 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도 늘어가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끊임없이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나 자신에게...) 화장은 하되 변장은 하지 말자고.... 나도 한때, 얼굴에 아무것도 바르지 않아도(색을 입히지 않아도) 순수했으며, 이쁘지는 않더라도 봐주기에 괜찮았으니 나만의 그 진정한 색을 없애지도 그리고 변화시키지도 말고 간직하겠노라고 말이다.
어른으로서 요즘 십 대들에게(어린아이들에게) 내가 어렸을 때 늘 듣곤 했던
"너희들은 화장 안 할 때가 훨씬 예뻐. 나이가 들면 저절로 화장을 하게 될 터인데, 왜 그 이쁜 얼굴들을 화장으로 가리려고 하는 거냐. 니들이 커보면 알겠지만 어린 시절엔 맨얼굴이 제일 이쁜 법이다."라는 씨알도 안 먹히는 말은 할 생각이 전혀 없다. 정작 나는 맨얼굴이 부끄러워 화장을 하면서 어찌 내가 그들에게 저런 말을 할 자격이 된단 말인가! 그저 나는 화장을 하더라도 그들의 아름다운 본모습들은 그대로 지켜야 함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으며 너무 아름답고 순수한 저들이(저들의 시간이) 화장으로(어차피 해야 하는 거라면 이왕이면 아름다운 덧칠함으로) 더욱 빛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살짝 욕심일 수도 있겠지만 나의 이 어리숙한 화장 안에서도 나의 순수함을(분명, 어딘가에 남아있을 겁니다. 잘 찾아봐 주십시요.) 알아봐 주시는 분들이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