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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young Aug 17. 2019

인물열전(나,사람 그리고 사람들)

알바열전Ⅰ(나의 찬란한 알바(을:乙의 인생)의 시작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 '아파야 청춘이다.'

나도 한때, 즉 20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이러한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인생의 진리쯤으로 생각하며 '그래 젊으니까 괜찮아. 젊을 때 고난은 인생의 명약이야.'라고 생각하곤 했었더랬다.

그러나 지금 나의 20대를 생각해 보았을 때, 그리고 인생의 중반을 달리고 있는 지금 이 시점에 드는 생각은 젊어서 고생도 적당히 해야 하는 것이며, 아프기만 한 청춘은 아픈 중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꿈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던 대학교 초년생 시절, (대학교 입학 면접시험날, 교수님께서 나에게 대학 와서 무엇이 가장 하고 싶냐고 물으셨을 때 나는 이글거리는 느끼한 눈빛으로 교수님을 똑바로 바라보고는 진지하게 답변을 했었다. "저는 배낭여행을 꼭 가고 싶습니다. 세계여행도 하고 싶습니다. 더불어, 아르바이트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웃으시면서 나의 씩씩함에 답변을 해주셨다. "학생, 여기는 군대가 아닌데...", 이렇게나 꿈이 많았었는데...), 나는 그리고 나의 청춘들은 예고도 없이 IMF라는 엄청난 혼란을 맞이하게 되었다. 세계 여행은커녕 당장 다음 학기에 등록금을 걱정해야 했으며 급격히 좁아진 취업문에 우리들은 다들 공무원 시험과 온갖 자격증 시험들로 뛰어들게 되었기에 대학생활의 낭만 같은 소리는 개똥보다도 찾아보기 힘들어졌으며 나를 포함한 모든 청춘들이(물론, 예외인 사람들도 당연히 있었지만..)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온갖 아르바이트를 찾아 나서곤 했었다.

나의 첫 아르바이트는 대학교 1학년 시절, 나라에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던 관공서 알바였다. 이 또한 엄청난 경쟁률을 자랑했던 터라 (지금도 여전히 이 아르바이트는 경쟁률이 셉니다. 특히 지방에서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기가 힘들기에 대학생들의 지원율이 꽤 높더라고요.) 나는 살짝 아빠 찬스를 이용하여(아버지가 공무원이셨기에) 인생 처음 아르바이트라는 것을, 즉 생전 처음 돈을 벌어보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관공서 알바는 (정확히 말하면 시청 알바) 딱히 육체적 노동을 요구하는 일들은 아니었기 때문에 몸이 고단하거나 피곤치는 않았다. 대신, 무언가 마음이 굉장히 불편했었다. 아버지, 어머니뻘 되시는 분들 속에 속해서 그분들이 지시하시는 일들을 조용히 기다리는 일은 육체적 노동보다 훨씬 기운 빠지는 경험이었다. 물론, 그분들 입장에서는 나라에서 지시한 사항이기에 어린 대학생들을 아르바이트생들로 고용했지만 이 어린 학생들은 나라일은 1도 알지 못하는, 그저 말로만 성인인 여전히 어린아이들이었기에 딱히 시킬 일도 그렇다고 마냥 놀리기도 많이 부담스러운 일이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 나는 인생의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건 바로, 사람이란 자고로 정당한 대가를 받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정당한 노동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점심 한 끼도 거저 얻어먹는 것은 결코 나의 살과 피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은 열심히 일하고 있는 곳에서 일없이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일은 가시방석이었으며 그러면서 또한 돈을 받는다는 것은 전혀 자랑스럽지도 그렇다고 기쁜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의 첫 아르바이트는 가치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던 개운치 않은 기억이 되어 버렸다. 약속한 일이었기에 한 달이란 시간을 채웠지만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그런 경험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공무원님들은 나를 꿔다논 보릿자루로 만들어 버린 야속한 갑들이었다. 비록 나의 아버지도 공무원이셨지만 여전히 나는(지독한 편견이겠지만, 그리고 공무원분들도 분명 여러 분야들에 종사하시겠지만, 더불어 당연히 훌륭하신 분들도 많겠지만..) 공무원님들에 대해 딱히 좋은 감정을 가지기가 어렵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래서 모든 분야의 첫 경험은 중요한 것입니다. 나의 첫 아르바이트가 공무원분들에 대한 일반화를 시켜 버렸으니까요.)


내가 대학교 3학년이 되던 시절, 나 또한 휴학을 감행하게 되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다음 학기 등록금이 부족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휴학 후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을 하였으나, 경제위기로 인해 취업자리도 하늘의 별따기인 마당에 나를 기다리고 있는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게 걱정스러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어느 날, 넷째 언니의 친구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게 되었다. 그건 바로, 시청에서 지적업무(일명 땅값 조사 업무입니다.)를 보조하는 아르바이트생이 필요하단 연락이었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으나 나는 심각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시청에서의 아르바이트에 대한 기억이 너무 안 좋았었기에 다시 시청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는 것에 적잖은 망설임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선호도 그리고 자존심도 자본주의의 횡포 앞에서는 아무 힘이 없었다. 어떡해서든지 돈을 벌어야 했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시청 아르바이트의 세계로 다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아르바이트 첫날, 누가 봐도 어색하며 도살장에 끌려온 소마냥 죽상인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나의 파트너가 되신 한 여성 공무원분이셨는데, 그분은 나와 같은 본의 성을 가지신 분이었으며 공무원이 되셨던 초기 시절 나의 아버지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며 나를 너무나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장장 3개월의 시간을 그분의 파트너로 일을 하게 되었다. 후에 들은 바에 의하면, 내가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기도 전에 그분께서는 다른 공무원분들께 무조건 나를 파트너로 하겠다며 미리 점찍어 놓으셨다고 했다. 물론, 나의 아버지의 영향이 가장 컸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 나는 그분께 일을 차근차근 배우며 일다운 일을 처음으로 해보는 경험을 가질 수 있었다. 실수를 해도 처음 하는 일이니 괜찮다며 격려를 해 주셨으며 갑과 을의 관계라기 보다는 진정 일하는 파트너로서 나를 대해 주시기도 했었다. 그리고 내가 가장 그분에게 감사한 일은 바로 나의 능력을, 그리고 나의 가치를 진정으로 인정해주시고 존중해 주셨다는 것이다.

어느 조직이나 마찬가지겠지만, 공무원 세계 또한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으며 여러 생각들과 사상들이 맞부딪히는 곳이다. 상하관계가 존재하고 갑과 을이 엄연히 뒤엉켜 부딪치고 있는 장소인 것이다.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훌륭한 인품의 사람들도 분명 존재하지만, 피하고 싶은 사람들도 당연히 존재하는 조직생활의 무대였던 것이다.

아르바이트생들이라고 예외는 없었다. 지적업무에 투입된 아르바이트생들은 대부분이 나와 같은 여학생들이었는데, (굳이 여학생들만 뽑은 것인지 아니면 지원자가 여학생들뿐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맡은 업무 외에도 각종 잡다한 심부름들과 사무실 청소와 같은 일들을 하게 되었다. (분명 전문 미화원 선생님들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가장 싫어했던 일은, 간혹 사무실로 손님들이 (공무원분들의 개인 손님들까지도.) 찾아오시는 경우에 우리 아르바이트생들에게 커피나 음료를 내어오라는 명령들이었다. (물론, 진정 기쁘고 대접하는 마음의 커피 심부름은 기꺼이 할 수 있으나, 강요에 의한 그리고 여자이기에 그러한 잡다한 일들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일은 너무나도 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중간에 투입된 아르바이트생이었기에 내가 업무를 시작하고 그러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자 다시금 뼈 저런 후회가 밀려오게 되었다.

'역시 관공서는 나랑 안 맞아. 차라리 몸이 피곤한 게 낫지. 도대체 왜 우리나라 남성분들은 바뀌지가 않는 것인가? 저들에게도 손과 발이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나는 손님이 올라치면 슬쩍 그 자리를 피하던가 아니며 엄청 바쁜 척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시간 후 약간의 휴식을 가지고 있던 나와 다른 아르바이트생에게 나이가 지긋하신 공무원분께서 직원들의 커피를 타라며 명령을 내리셨다. 순간, 단전으로부터 '훅'하고 불길이 솟아오르는 느낌이 들었으나(얼굴에 티가 팍팍 났을 것입니다.) 힘없는 아르바이트생이었기에 그리고 다음 학기의 등록금이 걸렸기에 주먹을 꽉 쥐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나의 파트너셨던 사수께서 나를 붙잡아 앉히고는 일을 할당해 주시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모두가 들으라는 듯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던지셨다.

"내 파트너한테 아무 일이나 시키지 마시라니까... 일을 시켜도 내가 시켜야지.. 고급인력을 그렇게 막 부려먹어서야 쓰나. 국가재정 낭비되게 시리..."

순간, 사무실은 얼음물을 쏟아부은 듯 냉기가 흘렀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커피 심부름을 시킨 그 아저씨의 눈치들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른 아르바이트생들 또한 이래저래 눈치만 보고 있는데 그중 가장 싹싹한 성격의 아르바이트생이 냉큼 일어나 커피를 타 오겠다며 탕비실로 총총히 사라졌다.

그리고 뒤이어 나의 사수께서는 탕비실로 사라지는 아르바이트생을 보면서 귓속말로 나에게 조용히 말씀하셨다.

"같은 여자가 저러니 바뀌려면 한참이겠지? 우리라도 저러지 말자. 같은 여자들을 욕 먹이는 짓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사수님을 바라보며 눈빛으로 나의 마음을 전했다.

'옛썰! 알겠습니다. 사수님을 따라 멋있는 여자로 거듭나겠습니닷.'

그 뒤로 나와 사수님의 사무실 생활을 그다지 평탄치는 못했다. 딱히 친한 아르바이트생도 없었으며 다른 공무원분들 또한 나를 그다지 좋아하지들을 않으셨던 것이다. '역시, 나와 공무원은 안 맞아.'

그러나 나의 사수께서는 정말 단 1도 개의치 않으셨다. 원래부터 겪어오신 일들이었던 듯, 본인의 임무를 묵묵하고 성실하게 해 나가셨다.

그리고, 그러한 강직함과 성실함은 결국 사무실에서 엄청난 업무량을 제일 먼저 끝낸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 나 또한 모든 아르바이트생들 중에서 일을 가장 먼저 끝냈기에 남은 알바기간 동안은 거의 놀면서 지내게 되었다. 어쩌다 일이 밀려 다급한 팀에서 지원 요청이 들어왔지만 나의 사수께서는 단호하게 거절을 하셨다.

"내 파트너는 할 일 다 하고 노는 겁니다. 고급인력이라 그랬잖아요. 돈 더 주실 거 아니면 다른 일 시키지 마세요."

내가 특별히 능력이 뛰어나거나 사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진짜 고급인력인지는 잘 모르겠다.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인데 나에게 무슨 뛰어난 능력이 있었겠는가? 모든 게 다 서툴고 엉망진창이었겠지... 그러나 그분은 그런 나를 믿어주시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기똥차게 알려주셨다. 그러면서도 나의 가치를 인정해 주시고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일어설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해 주셨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고급인력이 되어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능력자가 되어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꽤 많은 아르바이트를 해봤다. 나의 천직을 만나기 전, 어떻게든 먹고살아야 했기에 그리고 삶을 이어가야 했기에 가리지 않고 이런저런 일들을 했었다. 그 가운데 많은 스쳐가는 인연들을 만났었고 기쁜 일도 그리고 억울하고 가슴 아픈 일들도 당연히 겪고 헤쳐 지나왔다. 그런데, 그 모든 과정 속에서 항상 나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단어가 바로 '고급인력'이란 이 한 단어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툭'하고 던져준 그 한마디는 어떤 순간에서도 나를 기죽게 하지 않는, 그리고 나의 자존심을 일으켜 세워준 감동의 말이었다.

그 한마디가 내 속에 숨어있던 능력을 끄집어 내주었고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며 존중받아 마땅한 존재란 느낌이 들게 해 준 감사한 한마디였던 것이다.

삶에 있어서 가장 기쁜 일들 중 하나는 바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나의 능력을 믿어주고 존중해주는 일,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자, 남자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로, 그리고 인간대 인간의 동등한 위치로 인정을 받게 된다면 내가 나 스스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그리고 사랑하는 일도 아주 수월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 모두는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는 '고급인력'들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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