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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도시샤 대학에서
윤동주를 만나다.

- 식민지 조선 청년이었던 윤동주와 정지용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

나는 '도시샤' 대학으로 가기 위해 교토역에서 전철을 탔다.



도시샤 대학은 와세다, 게이오기주쿠 대학과 함께 일본 3대 사학 명문에 속하는 대학이라고 하며 1875년 니지마 죠가 설립한 도시샤 영어학교가 그 전신이다.

우리에게는 윤동주와 정지용 시인이 공부했던 대학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마데가와'역에서 내리자 대학생들이 전철 플랫폼에서 웅성웅성 모여 전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네 대학 전철역과 별다를 바 없는 풍경이다. 

특이하게 전철역은 곧바로 대학 캠퍼스와 연결되어 있었다. 천천히 계단을 밟고 올라 가자 아주 넓은 홀이 나타났고 많은 학생들이 여기저기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나누거나 책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학생식당이 바로 옆에 있어서 많은 학생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여전히 대학 캠퍼스에도 비는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나는 '윤동주 시비'를 찾기 위해 대학 정문 옆에 달린 캠퍼스 안내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윤 시인의 시비를 별도로 표시를 하지 않아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옆에 지나가던 경비원에게 '윤동주'라고 하자 '아하 윤상'하며 손가락으로 예배당 건물을 가리키며 위치를 알려 주었다. 부끄러움과 결백의 시인인 윤동주를 찾아간다는 설렘에 발바닥을 떨렸고 벌써 숨이 차 올라왔다.  관서지방을 대표하는 대학답게 캠퍼스는 참으로 깔끔하고 아름다웠다.

비 내리는 도시샤 대학의 풍경과 붉은 벽돌 건물들


길바닥은 모자이크 모양으로 잘게 나눠져 있고 내린 빗물은 작은 틈 사이로 흐르고 있었다. 

푸른 나무 사이로 가리어진 붉은색 벽돌은 더욱 고풍스러웠고 묘한 색채 대비를 이루며 고즈늑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경비원이 일러준 대로 예배당 뒤편으로 돌아서 가자 두 명의 방문객이 비를 맞으며 윤동주 시비 앞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는 다시 빗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윤동주 시비 앞에 섰다. 묘한 전율과 슬픔, 감동이 일어났다. 당신께서 거닐던 캠퍼스에 당신의 시를 가르치는 내가 왔고 당신이 고통스럽게 머리에 이고 다녔던 제국의 하늘을 지금 보고 있다.


나는 시비 앞에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윤동주 시인의 친필로 쓴 서시가 대리석에 새겨져 있었고 이름 모를 들꽃과 태극기는 비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뚜렷하게 한글로 쓴  '고요 빛 서린......바람과 꽃의 기억.....'이라는 글귀가 보이고 윤동주와 그의 친구들이 함께 찍은 흑백 사진이 보였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묵념을 올렸다.

불우한 조선의 청년이 다시 고향의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제국의 땅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그의 짧은 생애를 애달픈 마음으로 추모했다.

도시샤 대학 동문이었던 윤동주와 정지용의 시비가 나란히 서 있다.


정지용 시인의 비는 그의 시 '압천'이 새겨져 있고 만년필 한 자루와 오래된 술병과 술잔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윤동주와 정지용은 나란히 그들이 생활했던 '도시샤' 대학의 조용한 곳에서 자리 잡고 한국에서 찾아오는 많은 순례자들을 묵묵히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옆 연못에는 비단잉어들이 짙은 비린내를 풍기며 유영하고 있었다. 나는 빵 부스러기를 받아먹는 잉어의 수염에서 떨어지는 비를 보고 있었다.



나는 캠퍼스를 거닐어 보았다. 

그리고 윤동주 시인과 함께했던 나무와 풀과 대학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윤 시인의 발걸음 소리와 숨결을 들었을 저 푸른 나무들.

도시샤 대학은 정말 아담하고 정갈한 모습 그 자체였다. 붉은 벽돌과 흰 대리석, 푸른 나무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아름다운 풍경을 제공하고 있었다. 

오후 늦은 시간인지 학생들은 많지는 않았다. 

그 옛날 윤동주 시인도 책보를 들고 조선 청년의 설움을 삼키며 근대문명에 대한 호기심으로 새로운 학문을 배우고자 바삐 거니었을 캠퍼스. 

아마 저 이끼 낀 큰 나무 아래 책도 읽고 아리따운 여학생들과 이야기도 나누었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합창 소리에 발걸음이 멈추었다. 

나는 그 소리의 출발점을 찾아 아주 고풍스러운 건물에 이끌려 들어갔다.

독일인 seel이 설계한 클라크 기념관과 다양한 서양 건축물들



그곳은  무려 1893년에 건립한 '클라크 기념관'이었다. 기독교 신자였던 윤동주도 이 건물에서 성가를 부르며 합창을 했을 것이다. 비 소리에 담겨 들려오는 성가대의 목소리는 너무 청아하고 맑았다. 

하루의 고단함이 풀리는 듯했다.

다시 전철을 타기 위해 처음 만났던 넓은 홀이 있던 건물 쪽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빈 테이블에 앉아 지나가는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그들도 낯선 이방인을 져다 보았다. 아무런 대화는 없지만 우린 한 공간에서 존재하고 있고 그 자체가 교감이었다. 이 짧은 찰나의 순간이 다시 만날 수 없는 인연인 것이다.

'이마데가와' 역은 복잡했다. 전철 소리와 함께 여대생들의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청아하게 들렸다. 

말의 뜻은 헤아릴 수 없었지만 그녀들이 윤동주의 후배라는 사실만으로 정겹게 들렸다.


다시 교토역에서 내려 출구 방향으로 걸어가는 순간 한 여대생의 배낭에 부착된 핀버튼이 눈에 들어왔다. 

그 핀버튼에는 분명 한복 저고리와 치마를 입은 소녀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약간 긴 단발머리. 면바지와 체크무늬 난방을 입은 그녀. 재일교포였을까. 아니면 도시샤 대학에 유학 온 한국의 처녀였을까. 

궁금한 마음에 말을 붙여볼까 고민하던 중 그녀는 급히 출구 방향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나도 덩달아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좇아가 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교토에서 조선의 마음을 담고 살아가는 그녀의 향취가 교토역에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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