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을 한다고 하면 주변에서 꼭 물어보는 말이 있다. 얼마나 빨리 뛰는지 대회 나가면 몇 등이 나고 물어본다. 그러면서 한 6700등 정도 했어 라고 대답하면 뭐 그것밖에 못 뛰냐고 놀리곤 한다. 처음에 욱하거나 기분이 상했는데, 그 질문은 한 친구의 다리는 초등학교 이 후로 한 번도 뛰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해하기로 했다. 굳이 얼마나 힘든지, 속도보다는 완주가 더 중요한 거라고 설득해 봤자 돌아오는 말은 조롱과 야유로 가득했기에 웃어넘겨야 했다. 괜히 더 설전을 벌였다간 어색해지고 나는 좀팽이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뛰는 사람들 다시 말해 러너들은 자의든 타의든 그 '기록'에 은근히 신경을 쓰게 된다. 물론 프로선수가 아니고 취미 혹은 건강을 휘해 뛰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대회를 나가면 십중팔구 자신의 페이스보다 훨씬 빠른 오버페이스로 치고 나가게 된다. 천천히 페이스를 지켜야지 하며 마음은 먹지만 이상하게 나보다 앞질러 가는 그 이름 모를 선수가 나를 비웃 그냥 한 듯 이상하게 기분이 나빠온다.
기록 못지않게 남의 시선도 신경을 쓴다. 혼자 뛰는 스포츠고 자신과의 경쟁이 중요한 운동이라 말하지만, 막상 대회를 나가면 나 보라는 듯 휘황 찬란한 옷과 현란한 신발 액세서리로 자신을 양껏 꾸미고 뛴다. 그게 비록 뛸 때 거추장스럽더라도 말이다. 사는데 전혀 필요 없지만 화려한 공작새의 꼬리처럼 누군가에게 보여주려고 뛰는 건 확실하다. 셀카를 뛰면서 뛰는 사람들 또한 적지 않다. 누구보다 빨리 뛸 수 없으면, 누구보다 돋보여야만 한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우리 엄마 말처럼 돈을 내고 길바닥을 뛸 이유가 없다.
나 역시도 의식을 안 하고 달리기를 했다면 거짓말이다. 누구보다 빨리 뛸 수 없는 나는 암컷에 어필해야 하는 공작새처럼 그 거추장스러운 꼬리에 신경 쓰기 시작했다. 전혀 달리는 근육과 상관없는 민소매를 입었을 때 돋보이는 그 아몬드 삼각근을 만든다. 헬스장에서 덤벨을 잡고 팔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얼마나 갈라지는지 거울을 보고 있다. 정작 뛸 때 왼쪽 팔 치기가 안된다는 주변 사람의 말은 전혀 들리지가 않는다. 나는 기록 단축을 위해 뛰는 선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반 사람들이 잘 입는 브랜드를 직구를 통해 구매 함으로써 남들과 다른 나만의 정체성을 두 다리가 아니라 카드로 만들었다. 패션만 보면 누가 봐도 잘 뛰어 보이게 조던을 신으면 농구를 잘해 보이고, 언더 아머를 입으면 벤츠프레스를 더 들 것같이 보이게 말이다.
그럴듯한 선수로 포장한 내가 결승선을 도착했을 때 나의 기대와 달리 어떠한 감동도 감흥도 없었다. 포토라인에 찍힌 내 모습은 그냥 땀에 쩔어 있었고, 눈을 풀리고 입은 벌어져 있고 전혀 '멋'이라는 게 없었다. 달리고 있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면, 마치 CF의 한 장면처럼 힘차게 내일을 향해 달리는 그런 야망 가득한 젊은이의 뒤태일 거라 생각했는데 현실에서는 나를 비추는 무대 위의 화려한 조명은 없었다. 동네를 뛰는 거랑 서울 한 복판을 뛰는 거랑 차이는 없었다. 사람이 조금 더 많은 거 빼고는.
42.195 풀코스를 완주했을 때, 영화처럼 퀸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도 아니고, 하늘 위의 태양이 나만 비추는 게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빨리 샤워하고, 맥주 마시고 싶었다. 그게 다였다. 혹자들은 뛰면서 의미를 찾고 인생을 배운다고 하는데, 솔직히 인생이 마라톤과 같이 직선코스도 아니고 버티기만 한다고 누구나 완주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마라톤과 인생을 비유하는 게 적절하지 않아 보였다. 소금에 절여진 듯한 배추 같은 나의 육신으로 다시 집으로 돌아갈 생각 하니까 까마득했다. 42.195를 뛰기 위해 나는 40킬로를 운전해서 왔다. 어째서 차로 1시간 거리를 두 다리로 4시간 동안 뛰었는지 웃음이 나기만 했다.
그런데, 난 달리기가 끝난 후 인생의 의미를 찾았다.
바로 삼겹살
이거 끝없이 들어간다. 삼겹살의 육즙은 4시간 동안 흘렸던 땀방울의 가치를 느끼게 해 주었다. 세포 하나하나 DNA에 새겨지는 느낌. 내 몸은 그렇게 고기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뭐라 할까 2만 년 전 구석기 인류가 사냥감을 찾기 위해 4시간 동안 쉬지 않고 뛰다가 사냥에 성공한 것처럼.
아마 맘모스를 구워 먹으면 이런 맛이 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고기지만 다른 고기였다. 돼지가 아니라 맘모스였다. 우리 조상님들은 이렇게 힘들게 고기를 드셨구나 생각하니 뛰면서 인생의 의미니 하는 것들이 부질없고 남들에게 보여주려고 치장하고 쓸데없는 근육을 키웠던 게 부끄러웠다.
생존 투쟁 그 숭고한 가치..
인류의 역사가 365일이라면 인간이 농사를 짓고 정착해서 살아간 시간은 고작 2시간에 불과하다. 나머지 시간 364일 22시간 동안은 온종일 사냥감을 찾아 헤매 뛰어다니다가 운 좋은 날에만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오래 달리는 능력은 네발 달린 동물보다 속도가 느린 인간들의 유일한 장점이었다. 무슨 말이냐면, 오래 달리기가 가능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른 동물들보다 물가에서 벗어나 오랜 시간 머무를 수 있었다. 직립보행을 하는 인간은 머리에만 태양이 비추기 때문에 열에 강했고, 그만큼 갈증에 강했기 때문에 오래 달릴 수 있었다. 일종의 직립보행은 냉각장치 에어컨과 같은 기능을 했다. 그래서 인간보다 이빨과 발톱이 날카롭고 더 빠르고 강한 야생동물들을 사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집 강아지가 나보다 빠르지만 나보다 오래 뛸 수는 없다. 이 아이는 온몸에 털이 있고, 짧은 다리라 바닥의 열을 다 받고,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는 금방 혓바닥이 나오기 때문이다. 사냥하는 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죽어라 발자국을 보고 쫓아다니다가 목말라 지쳐있는 사냥감을 잡는 것이다. 영화처럼 창이나 돌멩이 따위로는 리모컨도 씹어먹는 우리 집 강아지도 못 잡는다. 오래 달릴 수 없는 것들은 물가와 나무가 우거진 숲을 벗어날 수 없다. 인간과 비슷하게 생긴 원숭이가 지구를 정복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삼겹살을 먹고 깨달았다.
달리기 특히 오래 달리기가 인류 생존과 번영의 1등 공신이라는 사실을..
이제 누군가 왜 뛰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답해야 한다.
난 이제 더 이상 남을 이기는 달리기도 아니고 남에게 보여주는 달리기도 아니다.
난 그냥 달린다.
"고기 먹을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