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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티 Jul 17. 2020

어떻게 조선 왕조는 500년을 버텼나?

-사유재산과 충효사상-


조선시대 왕 중 떠오르는 왕을 말해보자. 태조 이성계, 왕자의 난 태종 , 세종대왕, 세조 ,연산군, 그리고 영조 정조 더 넣을 수도 있지만 보통 6명의 왕이 떠오른다.


나머지 왕들이 바로 생각이 안 나는 것은 역사 공부가 부족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존재감이 약했다는 뜻과 같다.      


그렇다면 존재감이 약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왕보다 신하가 더 존재감이 강했다는 말이다.

조선은 고려와 다르게 과거에 합격한 이른바 엘리트 신하들이 다스리는 사대부 국가였다. 물론 사대부 국가에서는 왕도 큰 사대부에 지나지 않아, 어렸을 때 고3 수험생 뺨치는 공부 (경연)을 받아야 만 했다. 그것도 학문과 격식이 아주 뛰어난 신하한테 말이다. 지금으로 따지만 전국 1,2,3등이 선생님이 되어 왕을 가르쳤 던 것이다. 당연히 주눅이 들거나 나이가 먹었어도 왕이라고 해도 공부를 가르쳐 준 스승과 같은 사대부들을 함부로 대할 순 없었다.      


사대부들은 겉으로 왕을 섬겼으나 실은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조종하고자 했고,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엇갈릴 경우 왕을 내세워 정적을 제거했다. 이른바 국사시간에 죽어라 외웠던 사화가 되겠다.


또한 왕위 계승권자가 아닌 중종 선조 인조 효종과 같은 왕을 직접 발탁하는 경우가 있었다.     

18c 영 정조 때 잠시 왕정복고가 이루어졌지만 이후 19c는 역대급으로 신하들의 폐단이 극심한 이른바 세도정치 시대다. 중앙정치가 완전히 실종되고 관리들은 매관매직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민란은 끊이지 않았다.     


조선은 왕보다 신하들이 더 권력이 막강한 “군약신강”의 나라였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홍경래의 난 이후 각종 민란까지 난리를 겪고 하물며 19세기는 세도정치로 썩을 대로 썩었던 조선이 어떻게 500년이나 버틸 수 있었단 말인가? 심지어 임진왜란 때 나라를 버리고 도망갔던 선조, 병자호란을 자초했던 인조를 두고도 피지배층들은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고자 목숨을 바쳤다. 중앙정부가 제 역할을 못하는데도 왜 많은 백성들은 여전히 정부에 충성을 바쳤을까?      


어째서 우리는 다른 나라와 같은 혁명이 없었을까? 왜 그들은 나라를 뒤집지 못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조선왕조를 500년이나 유지하게 한 것은 바로 유교사상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충과 효 사상이 할 수 있겠다.     

최대 민란인 홍경래의 난을 다룬 <홍경래 전>에서 이런 구절이 나온다.     


“너희들은 본디 조선의 백성으로 의식 생장이 나라의 은혜인데, 이제 부도덕하게 행하니 하늘이 벌할 것이다.”     


의식 생장은 ‘입고 먹고 나고 자란 것’이란 의미로 다른 말로 바꿔보면 나라의 모든 재산은 모두 왕의 것인데 빌려 쓴 주제에 어찌 은혜를 모른다는 말과 같다.     


선조가 의주로 도망갔을 때도 세도 정치 시기 모든 민란이 결국 실패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백성 본인들이 열심히 일해 세금을 내서 나라가 유지가 되는 건데, 나라가 나를 먹여 살렸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것이 바로 유교 이데올로기의 힘이다.     



홍경래의 난에서 “의식생장이 나라의 은혜” 라는 말은 왕토사상을 의미하고 다른 말로 하면 동양에서는 사유재산이 없었다는 뜻이다. 왕이 오너인데 설령 오너 가 잘못을 했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민중이 왕을 타도하겠다는 발상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프랑스와 같이 단두대에 왕을 처형하는 그런 상상도 역시 말이 안 되는 생각이다.     


그에 비해 서양은 사유재산의 관념이 일찍부터 존재했고 지위에 무관하게 누구나 사유재산과 재산권이 인정되었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물론 소수의 지배층이 다수의 피지배층을 착취하는 엄격한 신분제 시스템이었다.

중세의 농노와 조선의 노비나 모두 본인이 열심히 일해서 갖다 바치기는 마찬가지 었으나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서양의 기독교 문명 안에서는 형식적이지만 모든 인간은 신 앞에 평등하다는 논리가 있다. 따라서 귀족이든 농노든 왕이든 모두 신 앞에 평등한 게 맞다. 모두가 평등한데 어떻게 지배를 할 수 있을까?     


lady라는 말 자체가 빵을 굽는 여자라는 의미가 아닌가? 이 시대에 빵을 굽는다는 것은 화덕이 있는 매우 플렉스 한 집이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화덕이 없는 집은 어떻게 빵을 먹어야 할까?


당연히 없으면 빌려서 이른바 렌탈로 사용해야만 했다. 중세의 방앗간이나 화덕은 수도원이나 귀족의 차지였으므로 이를 이용하려면 당연히 렌트비를 내야 했다.


바로 생산수단을 사용한 대가 이른바 “이용료” 명분으로 착취를 하는 것이다.      

반면 동양에서는 높은 신분은 낮은 신분을 “소유”하는 개념이 컸다. 그래서 서양처럼 명분을 내세울 필요가 없었고 자연스럽게 지배했다.     


원칙적으로 모든 재산을 국가가 소유하는 왕토사상에는 사유재산이 없었다는 점

백성들이 국가와 정부를 동일시하고 정부에 대한 충성을 내면화 한점

상위 신분이 하위 신분을 통째로 소유한 점     

이러한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정치권력이 가장 중요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유일한 출세길은 고시공부를 해서 과거에 합격하는 길이다. 성공이란 의미는 장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가 되는 것이다. 벼슬을 하는 게 사업보다 훨씬 중요했다. 왜냐하면 사유재산이 없으니까 재산을 모았다간 빼앗기기 일 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몽룡이는 춘향이가 기다리는 데도 고시 공부하러 떠날 수밖에 없었다. 변사또는 자기 여자도 아닌데 함부로 수청을 들라 할 수 있었다.     


관리가 되면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는 동양의 뿌리 깊은 관습은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다.


정경유착과 상사가 직원을 마치 군대 후임처럼 갈구는 것도 쉽게 근절되지 않은 이유도 역사적 뿌리에서 비롯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준만큼 받은 만큼만 일을 시키고 하면 된다. 마음에 안 들면 재계약을 안 하면 그뿐이다.     


자본주의를 비판하지만 우리는 아직 자본주의를 제대로 시행도 못하고 있는 듯하다.           


여전히 우리 마인드는 왕조시대에 머물러 있는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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