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아버지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막내 동생입니다. 그러다 보니 저와 나이 차이가 그리 많이 나지는 않아, 삼촌이라기보다는 제게는 마치 형처럼 느껴지던 분이셨습니다.
부모님이 결혼하셨을 당시 작은아버지가 중학생이었으니 아버지 어머니에겐 아들 같은 동생이고 또 시동생이었습니다. 저희 집에서 함께 지낸 시간도 많았고, 어릴 때는 어머니가 직접 목욕을 시켰을 정도로 매우 가까운 가족이었습니다.
가족이 광주에 터를 잡고 살게 되면서 당시 대학생이던 막내 삼촌은 저희 집에 같이 살며 저와 같은 방을 썼습니다. 덕분에 삼촌 친구들도 두루두루 많이 알게 되었고, 당시 편지를 주고받으며 데이트하던 여자친구 얘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삼촌이 좋아하던 이선희, 구창모 노래를 함께 들으며 저도 그런 가수들이 자연스레 좋아지기도 했습니다.
당시 막내 삼촌은 그냥 멋진 대학생 형처럼 보였습니다. 얼굴도 말끔하니 잘생겼고, 옷차림도 센스가 있었으며, 말하는 것도 뭔가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무엇보다 글씨를 참 잘 쓰셨습니다. 그냥 낙서처럼 대충 쓰는데도 정말 그럴듯하고 멋졌습니다. 여러모로 근사한 면이 많았던 삼촌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작은어머니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고, 이제는 함께 못 산다고 생각해 왠지 모를 비통함에 저 혼자 눈물을 찔끔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이후 작은아버지는 광주를 떠나 서울 생활을 시작하셨고, 지금은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전문직으로 왕성하게 사회생활을 이어가고 계십니다.
IMF 시절이었습니다. 갑작스레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학비가 막막했던 그 시기에 작은아버지께서 선뜻 도움을 주셨습니다. 당시 건축사셨던 작은 아버지께서도 사실 매우 힘든 시기였습니다. 크고 작은 건설사들이 줄줄이 부도 나고 폐업하는 등 온 나라가 난리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별다른 내색 없이 기꺼이 도와주셨습니다. '이런 걱정 말고 너는 학교 갈 준비나 하라'며 어깨를 두드려 주셨던 그 마음이 지금 더욱 감사하게 느껴집니다.
첫 취업을 하게 되었을 때 잠시 작은아버지 댁에 머문 적이 있었습니다. 운 좋게 한 외국계 기업에 합격했던 저는 작은아버지께 철없이 회사 자랑을 하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큰 회사이고, 연봉은 또 얼마며, 복지는 어떤 게 있는지,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어릴 때부터 닮고 싶고 좋아하던 사람에게 어쩌면 조금이라도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그랬던 것도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번은 작은아버지께서 제게 불쑥 물으십니다.
"그런데 너는 회사가 직원들에게 월급을 왜 준다고 생각하냐?"
별생각 없이 "그거야 뭐, 제가 열심히 일하니까 월급을 주는 거 아닐까요?"라고 웃으면서 대충 대답을 했지만, 작은아버지는 진지하게 말씀을 이어 가셨습니다.
"회사가 월급을 주는 이유는, 더 큰 이익을 회사에 만들어 오라는 뜻이야. 결코 그냥 주는 돈이 아니야. 이제 너도 직장 생활을 시작하니 월급의 진짜 의미를 알고 일해야지"
사회생활이라고는 고작 몇 주밖에 해보지 못한 터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는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회사에서 IT 컨설턴트로 일을 하였습니다. 일 년에 서너 차례씩 고객사에 나가 프로젝트를 하곤 했었죠. 나중에 고객사가 제게 지불했던 서비스 단가를 알고 나서는 그제서야 그때 하신 말씀을 조금 더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회사를 다니며 또 가정을 꾸리고 살아갔습니다. 명절이나 생신이면 작은아버지께 안부 전화를 드리기도 하고, 함께 식사를 하거나, 가끔은 술 한잔도 나누면서 사는 얘기를 서로 나누곤 했었죠. 그때마다 작은아버지께서 종종 하셨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을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너무 거기에 매여 살지 말아라. 다 어떻게든 살아 간다."
당시 저는 아내와 맞벌이를 하며 세 아이들을 키워야 했었고, 그러다 보니 매달 부부의 월급과 또 생활비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이자 동시에 걱정거리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들을 때면 속으로 "에이, 당신께선 돈 걱정이 없으시니 그렇게 말씀을 하실 수 있겠지만, 우리 상황을 알면 그런 말씀은 못하실걸"이라는 생각도 솔직히 들곤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어느새 그 의미가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당시 저는, 말로는 그렇게 돈 돈 거리면서도 그렇다고 정작 죽기 살기로 저축을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또 다른 특별한 삶의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한마디로 겉으로는 시니컬하게 스트레스 잔뜩 받으며 사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속으로는 이도 저도 아닌 매우 불안하고 어정쩡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었죠.
이런 저런 성장통 속에서 저도 조금씩 변해 가기 시작했습니다. 넉넉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그때부터 가족 여행을 많이 가려고 했고, 아이들과 캠핑이나 아웃도어 활동도 자주 할 수 있도록 아내와 많은 신경을 썼습니다. 아이들은 이내 훌쩍 커버렸지만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쌓였던 가족들과의 즐거운 기억들이 없었다면 지금 제가 자부심을 느끼는 제 삶의 의미와 가치를 과연 가질 수 있었을까요?
봄볕에 가지 늘린다는 말은 사람의 성장을 위해 좋은 환경이나 긍정적인 영향이 매우 중요하다는 뜻의 속담입니다. 꼬맹이 시절 무작정 닮고 싶었던 대학생 형은, 제가 어려울 때도, 철없는 생각을 할 때에도, 때로는 방황하고 세상에 치일 때에도 한 명의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셨습니다. 저 역시 내 아이들에게, 또 다른 이에게 봄볕 같은 어른이 될 수 있도록 다짐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Spring sunshine stretches the branches" is a Korean proverb meaning that positive influence and nurturing environment are essential for growth. This essay traces the author's relationship with his young uncle, who was more like an older brother. From childhood admiration through difficult times during the IMF crisis, the uncle provided crucial support and wisdom—helping with tuition, teaching the true meaning of salary, and offering perspective on money and life. These gentle lessons, like warm spring sunshine, helped the author mature from an insecure young professional into someone who values family memories over financial anxiety. Now a parent himself, he aspires to be that same nurturing presence for his own children and oth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