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센터 직원들은 백신 우선접종대상이었다. 우리 팀 서무님이 5월 중순 백신 접종 비희망자를 신청받았다. 나는 백신의 후유증보다는 '백신 휴가'가 귀에 더 들어왔다. 백신을 맞으면 쉴 수가 있다고 생각하니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아스트라든 화이자든 뭐가 중요하겠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쉴 수 있는데 말이다.
즐겁게 예약을 하고 싱글벙글 웃으면서 주사를 맞으러 갔다. 평일 오후 여름 햇살이 얼마나 반갑던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를 만나러 가는 마음으로 병원을 향했다. 주사를 맞고도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하면서 평소 큰 건물 안에 갇혀 한동안 보지 못했던 평일의 온도와 주변 공기들을 온몸으로 느끼며 행복했다.
모두가 추천을 해서 아프지 않았지만 자기 전 미리 타이레놀을 먹고 잤다. 하지만 고통은 한밤중 찾아왔다. 전기요를 틀고 자는 데도 이빨이 덜덜 떨릴 정도로 오한이 몰려왔다. 타이레놀을 한 알 먹고 잤다. 한 시간 후 이번엔 38도 정도의 고열로 온 몸에 땀이 흘렀다. 또 타이레놀을 먹었다. 타이레놀에 밤을 의존하고 다음 날도 하루 종일 2시간 간격으로 타이레놀을 먹었다. 약기운으로 몽롱하게 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고용센터 서무인 동기에게 연락이 왔다. 우리가 이제 곧 시보가 끝나서 시보 종합평가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그게 오늘 오후 3시까지는 제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병가 중인데 미안하지만 오늘까지 작성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우리 센터만의 특별사정이 있어서 그렇긴 한데 기밀까진 아니지만 일단 여기서 밝히지는 않겠다.
여하튼 서식을 메일로 보내라고 했다. 시보 평가서의 핵심은 내가 그동안 시보 공무원으로서 약 5개월간 한 일의 기록과 나에 대한 윗분의 평가의견, 평가점수 등이다. 나는 타이레놀로 온 몸이 점령당한 듯한 상태에서 내가 써야할 부분들을 써 내려갔다. 들려오는 말로는 이 시보 평가서는 극히 형식적이고, 의미가 없는 것이라서 가볍게 적으라고 했다고 한다.
9급 나부랭이 정도의 시보기간이야 높은 윗분들에게는 형식적이고 의미 없는 것이겠지만 내 인생에서는 소중한 한 페이지이기에 나라도 정확하게 사실적으로 기록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내가 한 일을 상세히 적었다. 내가 5개월이었지만 다른 동기에 비해 중간에 업무도 바뀌는 등 다양한 일을 하긴 했다. 정확하게 나를 제외하고는 다들 6줄 이내로 쓴 듯하다. 심지어는 3줄을 쓴 동기도 있다. '위 시보 ooo공무원은 ~~ '이런 식으로 시작해서 마무리를 한 듯하다.
하지만 나는 A4지 2/3 정도는 썼다. 시보 평가서 밑에는 작은 글씨로 시보 공무원의 국가관, 공직관, 책임감, 성실성, 평소 근무태도, 동료와 관계, 조직의 적응, 발전 가능성 관련하여 반드시 기재하라고 되어있다. 나는 이 지침을 아주 정확하게 반영하기 위해 애썼다. 다른 동기들에게 말했더니 '그런 게 어디 있었냐'며 모두 놀라워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내가 '4차원'임을 인정해줬다. ㅎㅎ
나는 나를 객관화하며 열심히 평가자의 관점에서 평가서를 썼다. ㅎㅎ 근데 뭐랄까. 쓰면 쓸수록 이제 갓 들어와서 이렇게 정성껏 하루하루를 살아온 나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나의 '시보 평가서'는 나를 제외하고는 '형식적이고, 의미 없는 것'이지만 나에게만은 나의 치열한 5개월의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다 쓰고 나니 심장이 울컥해지더니 눈물이 날 뻔했다. 그리고 이건 윗분들의 빅 픽처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사실 시보 평가서를 작성하는 것은 내가 나를 평가하게 해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며 나를 반성하고 초심을 기억하라는 등의 엄청난 프로젝트였던 게 아니였던가.
센터 서무 동기에게 '약기운에 중언부언한 것 같다' 말하며 시보 평가서를 후딱 보내버렸다. 그때 당시로는 도저히 두 번은 읽을 수 없는 눈물과 감동의 시보 평가서였다. 그리고 또 난 약기운에 잠을 잤다. 다음 날 출근했지만 여전히 열이 나고 기운이 없어서 오전에 조퇴를 하고 다시 집에서 온종일 잠을 잤다.
조금 정신을 차려보니 쌓인 일이 너무 두려워 토요일에 회사를 나갔다. 그리고 천천히 일을 하면서 나의 시보 평가서를 다시 읽어봤다. '와, 완전 이불킥 각이었다.' '와 미쳤다. 다시 회수할 수 없나'
우리 팀 서무님에게 물었다.
"저 서무님. 시보 평가서 소장님 결재받고 어디 뭐 보존되고 그러는 거 아니죠?"
서무님이 말했다.
"샘 그거 센터에서 수정할 부분 수정한 뒤 결재하고 지청 고용관리과로 서류 넘어가고 그거 다시 00청으로 넘어가요. 그리고 보존기간 있을 거예요. 서류마다 달라서, 시보평가서니 샘들 공무원 재직기간 동안은 보존되지 않을까요?"
난 생각했다.
'내 시보 평가서를 읽은 윗 분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 시보 평가서는 얼마큼 난도질당했을까 본연의 모습을 어느 정도 지키고 있을까?'
백신의 부작용은 생각보다 컸다. 사실 지금도 백신과 타이레놀에서 완전히 몸이 해방된 상태가 아니라서 글을 올리기 무섭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