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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반지 May 09. 2022

공무원이 된 후 발견한 나의 찐 재능

고용센터 김주무관 이야기

나는 숫자를 싫어했다. 고3 때 문과였던 나의 수학 공부 방식은 ‘암기’였다. '숫자'라는 녀석은 나에게 틈을 주지 않았다. 옆에 갈 수 조차 없었다. 그래도 시험은 봐야 하니깐 내신은 수학책을 외웠고 수능은 EBS 수리영역 문제집의 풀이법을 외웠다. 점수는 다행히 50점 이상은 나왔다. ㅎㅎ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모든 '숫자'와 떠들썩하게 이별을 고했다. 정작 '숫자'는 내게 '정'도 준 적이 없었다. 내가 나의 성적을 위해서 억지로 바지 자락을 붙들고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너를 버린 것처럼 그렇게 숫자들을 떠나보냈다.


돈은 생물인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돈'을 만나기 시작했는데 이게 또 이상하게 나에겐 제2의 '숫자'였다. 그래서 나는 자유 통장으로 이체해서 받거나 현금이 생기면 냉장고에 넣어놨다. 이상하게 돈(=지폐)도 생물처럼 느껴져 실온에 보관하면 썩을 것 같아서 종이봉투에 넣어 냉장 보관해야 마음이 편했다.


그걸 보고 지금의 남편인 당시의 남자 친구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남자 친구는 문과였지만 숫자와 이미 절친 사이였으며 내가 보기엔 친함을 넘어 숫자를 능수능란하게 관리하는 실력자였다.  남자 친구는 냉장 보관돼 시원한 나의 '돈'='숫자' 들을 가방에 넣고 가까운 은행에 나를 데리고 갔다.


두 개의 적금과 무슨 변액 예금 2개와 이름이 아주 길었던 금융상품 2개, 총 6개의 통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의 모든 숫자들은 남자 친구가 데리고 갔다.  그것 때문인지 남자 친구는 지방직 공무원에 합격하고 시보를 떼자마자 나와 결혼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ㅎㅎ

'그러니까 남의 숫자를 쉽게 가지고 가면 안 되지. 늘 신중해야 돼'라고 신랑에게 자주 말한다.  


결혼 후 남편은 숫자와 나를 친하게 하려고 종종 '숫자'의 장점에 대해 강의를 했다. 은행마다 다른 대출금리들이 우리 가계에 끼치는 영향, 카드사마다 한 달 일정액 이상을 사용하면 할인해주는 각 종 교통비, 아파트 관리비, 통신비 등을 열심히 설명했지만 내겐 그저 고등학교 수학 시간 같은 소리였다.  

그래서 됐고 ' 내 한 달 용돈이 얼마입니까?'라고 외쳤다.



하지만 세상살이 내뜻 같지 않는 법.

난 지금 ‘숫자 세상’에 들어와 매일 매시간 매분 매초 숫자를 치고 있다.


고용노동부 직업상담직렬을 고민했을 때 나름의 포부가 있었다.  본인의 흥미와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설렜다. 직업상담사 1급 자격증도 취득했고 콜센터에서 나름 상담경험도 있으니 잘 해낼 거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기업지원팀에 발령받았다. '직업을 상담해주는' 직렬인지 알았는데 '직업을 상담해주는' 직업상담원(공무직)이 이미 그 일을 하고 있었다. 직업상담직 공무원은 고용센터에서 일반적으로 ‘심사’하는 모든 업무를 하고 있었다.


나는 기업지원팀에서 사업주에게, 근로자에게 서류를 심사하여 돈(=숫자)을 지급하는 업무를 하게 됐다. 처음엔 당황했고 시간이 조금 흐르니 뭔가 사기당한 느낌이 왔고 '그럼 왜 직업상담직이라고 하는가?' 하면서 말이지, 남편에게 매일 하소연도 해보고 친구들에게 고용노동부 뒷담화도 한참을 하고 그리고도 시간이 좀 더 지나자 인정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숫자'가 아니고 '내 일'이라는 것을.


선배 주무관님들은 계속 강조했다.

"지원금 계산 시 엑셀을 백 프로 믿지 말아라. 항상 마지막엔 네가 직접 계산을 해봐라"

선배 가르침대로 난 절대로 엑셀을 믿지 않았다. 계산기로 끝까지 계산을 해 본 후에 결재요청 버튼을 눌렀다.


업무가 바뀌면서 내 업무를 옆 주무관님에게 인수인계하던 중이었다.  1원 단위까지 철저히 계산하고 원 단위 절사 한 후 재계산 또 계산, 계산기 위에서 현란하게 춤추는 나의 검지와 엄지, 모든 상황을 숫자화 하기 등.


"하루 세 시간 40분 근무한 사람은 3.67로 처리하시고, 이 분은 하루 4시간 근무하신 분인데 6시간 파업하셨으면 1,2일로 처리해서 감액하시고, 한 달 소정근로시간은 한 주 근로시간에 주휴 시간 더 하시고 4.345주 곱하시고요. 이 사업장은 주휴를 포함한 포괄 시급 18,870원이라 48로 나누고 40을 곱해서 나온 15,725원을 기본시급으로 하신 후 209를 곱해서 통상임금을 결정하면 됩니다.”


그 주무관님이 그러셨다.

"주무관님 계산을 왜 이렇게 잘해요?"

"감액이며 삭감이며 하나도 이해가 안 되는데 계산 정말 빠르시네요."


갑자기 목구멍 공기가 이상한 데로 넘어가면서 심한 사레에 들렸다. 기침은 점점 심해져서 눈물, 콧물이 나오기 시작했고 얼굴이 새빨개졌다.


내 새로운 재능이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 사실 나는 계산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42년 동안 몰랐던 나의 재능, 나의 적성.

영영 썩혀버렸을 나의 재능을 공무원이 된 후에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지금은 긴 시간을 피해 다녔던 ‘숫자’와 친구가 되어 하루하루 즐겁게 일을 하고 있다.


심지어 실업급여 이직확인서 업무를 하는 동기에게도 상담 전화를 받는다. 이직확인서 업무 중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하루 소정근로시간을 구하는 일인 듯하다. 동기가 급하게 전화를 해서 묻는다.


“언니, 한 주는 5.5시간 3일 일하고 10.5시간 하루 일하고 하루 6시간 2일을 일하고 한 주는 5.5시간 2일 일하고 10.5시간 하루, 6시간 3일 일하는 근로자 한 달 소정근로시간이랑 하루 평균 소정근로시간은 어떻게 구해요?”


나는 엄청 당황하고 놀란 동기에게 일단 말한다.

“워워, 놀라지 마시고 00 씨 2주 단위 교대 패턴인데 놀라지 마요. 큰 틀의 개념을 이해하면 돼요. 자 잘 들어봐요.(여기부터 일반인들에게 도움 안 되는 어려운 계산 쇼가 진행되므로 자체 삭제^^)


한참 설명을 한 후, “00 씨 계산 문제 나오면 편하게 전화해요.”라고 말하며 여유롭게 전화를 끊는다.


하지만 여기에도 반전은 있다. 그 찐 재능이 김주무관일때만 발휘된다는 것이다. 김주무관은 여전히 빵집에 가서 계산을 할 때 암산이 서투르다. 그리고 예상한 대로 빵값의 총액은 정답을 비껴간다. 그래도 괜찮다. 사무실에서라도 엑셀과 친구가 되고 숫자와 친구가 된 것만으로 김주무관은 감사의 기도를 올려본다.


또다른 찐 재능을 찾아볼까?

<출처: 인사혁신처 블로그 김주무관이 쓴 글>

<사진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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