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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반지 Sep 24. 2022

나를 스쳐간 프린터 동료들

40대 늦깎이 공무원의 슬기로운(?) 공직생활


1. 치료제를 찾지 못해 떠난 까만 둥이


21년 2월 5일, 기업지원팀에서 처음 만났다.  검정고무신의 고무신처럼 온몸이 까맸고 좀 덩치가 있었다. 당시 서무님(지금은 다른 곳으로 가심)이 미안해하면서 "샘, 제가 올해 지청 가기 전에 꼭 좋은 프린터로 바꿔드릴게요. 샘 거 1번으로 바꿔드릴게요" 하셨다. 난 그때 그 말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몰랐다.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알았다. 나의 까만 둥이는 심각한 병을 앓고 있었다는 것을. '용지 걸림' 말기 환자였다. 그러니까 두장에서 세장을 뽑고 나면 반드시 '용지 걸림'이라고 정확히 '한글'로 본인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프린트 앞문을 열어보면 용지는 걸려 있는 게 없었다. 그러니까 너무 자주 '용지'가 '걸리'다 보니 이젠 용지가 걸려 있지 않아도 용지가 걸렸다고 생각해 버리는 그런 망상에 사로잡혀버린 상태였다.


나는 일을 하려면 하루 종일 서류를 출력해야 했다.  당시 교체 가능한 프린터는 없었다. 옆 주무관님에게 "어떡하죠?" 간절한 눈빛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옆 주무관님도 자주 '끼익 끼이익'소리를 내며 아파하는 까만 둥이를 알고 있었다.


옆 주무관님은 그러셨다.

"샘 제가 듣기론, 얘가 수명이 거의 다 됐다던데,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종이를 잡아당기는 그 롤러 있죠? 거기를 물티슈로 자주 닦아주는 것 밖에 없어요. "


6개월간 '용지 걸림' 병에 걸린 까만 둥이를 열심히 물티슈로 닦아주었다. 그나마 깨끗해지면 잠깐 정신을 차린 듯 1시간 정도는 일을 했다. 하지만 까만 둥이는 다시 망상의 세계로 들어갔'용지 걸림'이라는 단어를 결국엔 뱉어냈다.


그날은 한 장도 제대로 프린트를 하지 못했다. 이젠 롤러를 물티슈로 닦아주고 정신 차리라고 앞 뒤로 흔들어도 맑은 정신을 찾지 못했다. 소용없다 했지만 마지막이라도 의사 선생님께 진단을 받고 싶어서 기사 방문 서비스를 요청했다.


as기사님은 보자마자 그랬다. "아 이거 볼 필요도 없어요. 처음부터 하자가 있어서 더 생산을 안 하던 제품이라 교체할 부품도 없어요. 그래도 참 오래 잘 쓰셨네요."



2. 투톤의 멋쟁이, 미스터 Z군 안녕.


프린터 동료가 없으면 나는 아예 일을 못한다. 여러 기계 동료들이 있지만 프린터 동료도 내 업무의 막대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린터를 꼭 바꿔 주시겠다는 서무님은 지청을 가버렸다. 서무님이 본부에서 내린 노후 프린터 조사서에 교체 프린터 1호 까만 둥이 선정해 주고 가셨지만 까만 둥이가 기계 무덤으로 가는 날까지 교체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급한 대로 바뀐 서무님이 센터 본관에서 프린터 동료를 한 명 데려왔다.


색이 바랬지만 네이비와 크림색 투톤으로 화장을 한 멋쟁이였다. 까만 둥이와는 다른 회사 제품이었다. 투톤 멋쟁이는 외국인이었다. 본인 의견은 모두 영어로 표현했다. 'paper jam, open the front door and open the rear door and remove the paper'


하루 이틀 지나니 투톤의 멋쟁이 Z군은 이런 의사들을 자주 표현했다. 의심이 갔다. 이번엔 왠지 'paper jam'병에 걸린 동료가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신기하게 투톤 멋쟁이 Z군은 원하는 대로 해주면 서류는 출력했다.


하지만 하루에 20번 이상은 저렇게 앞문 열어라 뒷문 열어라 하니깐 조금 지치기 시작했다. 프린터 뒷문까지 열려면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다시 닫을 때 세게 '탁'하고 쳐야 문의 아귀가 맞기 때문에 팔에 '알'이 배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하루 종일 너무 무리하게 일을 시키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나의 고통은 잊었다. 하지만 쉼이 부족했던 투톤의 미스터 Z군의 'paper jam' 병은 악화되고 있었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폭염에 공기가 타들어갈 때도 1년 정도 나와 함께 달려왔던 투톤의 미스터 z군은 이틀 전 이런 의사를 표시했다.


"replace soon"

미스터 Z군이 처음으로 건넨 말,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toner reset, drum reset' 등은 종종 표현했었는데, reset이 아니고 'replace'였다.

두 단어의 차이를 심도 있게 고민해 봤다. 그리고 주어를 제외한 완전한 문장을 구성하던 미스터 z군이 왜 이번엔 목적어를 뺏을까?? 도대체 뭘 대체하라는 걸까?

지친 동료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포털에도 저 말을 검색해 보았다. 하지만 미스터 z군은 옛날 기계라서 정보는 거의 없었다.( 미스터 Z군도 나도 옛날 사람) 뭘까? 뭘 대체하라는 걸까?


그리고 저 말을 전한 후 투톤의 미스터 Z군은 많이 이상해졌다. 급격하게 자주 응급 시 사용하는 레드불을 켰고 'paper jam' 은 원하는 대로 이문 저문  다 열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반나절 아예 서류를 출력하지 못했다. 마침내 as 기사분이 오셨다. 기사분은 미스터 z군을 짧게 여기저기 보고 말했다.


"아직도 이거 쓰시는 데가 있네. 바꾸세요. 이건 부품은 있긴 있는데 부품값만 30만 원은 넘어요. 이것도 대충 봐서 그런 거고, 아니 하루 종일 출력하는데 애(Z군)로는 안 돼요. 그냥 바꾸세요."


나는 너무 궁금한 한 가지를 물었다. 미스터 Z군이 내게 남긴 저 한마디, 처음으로 보낸 저 한마디

"replace soon"


기계들의 의사 선생님답게 단번에 아셨다.

"이 말은 나 곧 죽을 테니 다른 애(프린터)로 대체하라는 거예요"


'아 ~~~ 그런 말이었구나.'

미스터 Z군은 본인이 죽을 것을 알고 있었고 나의 죽음에 연연하지 말고 새로운 프린터 동료를 찾아 너의 길을 가라는 것이었다. 마음이 미묘하게 울렁거렸다. 나도 한 팀으로 일한 다른 동료에게 최선을 다해 함께 일한 후, '나의 것'들이 소용없어지기 시작할 때 그 동료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제 도움이 안 될 테니 다른 동료를 찾아서 너의 길을 가도록 해"라고 말이다. 심플하게.

"네가 나에게 쉼을 주지 않아 내가 이렇게 됐잖아"라는 원망도 없이, 구질구질한 그런 변명도 없이.

부끄러웠다. 내 맘에 쌓였던 원망의 탑들이 소리 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순박했던 까만 둥이, 투톤의 멋쟁이 미스터 z군

'고마웠고 고마웠어 진정'


<사진출처 : 픽사 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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