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에 포함된 내용은 창작된 소설의 일부분입니다. 따라서,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 등을 포함한 이 소설의 모든 요소는 작가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허구적 창작물임을 밝힙니다.)
임원 B는 마치 땀이 줄줄 흐르는 전장에서 포로로 잡힌 것처럼 벼랑 끝에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는 마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몸부림치듯,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이 곧 끝장날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경영의 전면에서 활약하던 그의 지위는 이제 그저 사라져버린 영광에 불과했다. 회사 안팎에서 그를 향한 불신과 비난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고, 그는 그 벽을 넘지 못한 채 점점 더 압박감에 짓눌려갔다.
AB화학의 배터리 사업은 실패의 늪에 빠졌고, 그 깊이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주가는 끝없이 추락하며 주주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책상 위에 쌓이는 것은 서류가 아니라 날카로운 독설이 담긴 항의 메일과 손편지들이었다. 매일같이 "당신은 도대체 이 회사를 어떻게 말아먹고 있는 겁니까?"라는 서슬 퍼런 질문들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 뒤에 숨어있는 욕설과 비난, 조롱은 그의 정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임원 B는 이미 이 상황을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하지만 그를 진정으로 벼랑 끝으로 몰아넣는 것은 바로 그가 저지른 어두운 비리였다. 오랜 시간 은밀히 즐기던 내연녀와의 사치스러운 생활, 회사의 자금으로 그들의 방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법인카드를 마음대로 휘둘렀다. 전용기로 그녀를 모시고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닌 그날들, 그는 그때만 해도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과거의 자신감이 오히려 자신을 옥죄는 덫으로 변했다.
엄모순 회장이 그날 아침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의 말은 날카로운 독침처럼 가슴을 찔렀다.
“B 부회장, 네가 이 회사 돈을 (기생충처럼) 쪽쪽 빨아먹는 동안, 배터리 사업이 나락으로 빠져드는 걸 얼마나 더 두고 봐야겠나?”
김탁기, 엄모순의 비서이자 그룹의 암살자 같은 존재, 그는 언제나 그렇듯 엄모순의 곁에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엄모순이 감옥 생활을 하는 동안 그룹의 모든 움직임을 샅샅이 매일 문안 인사하듯 보고하고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심지어 속옷까지 챙겨 입의 혀처럼 굴어온 덕에 부사장급 대우를 받는 비서로 한번에 승진한 김탁기. 엄모순이 있는곳엔 항상 그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그는 마치 지옥의 문을 열고 서 있는 문지기처럼 서류를 들고 조용히 대기하고 있었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과 회색빛 옷차림은 마치 살아있는 강철 로봇 같다. 그는 항상 임원 B에게 불길한 존재로 다가왔다. 무엇이든 알고 있는 것 같은, 모든 것을 예견하고 움직이는 저승사자 같은 인물이었다. 그가 서 있는 모습 자체가 공포였고, 그의 존재는 엄모순이 임원 B에게 보내는 경고나 다름없었다.
엄모순은 서류를 집어 들고는 임원 B의 책상 위에 무자비하게 내던졌다. 그것은 단순한 서류가 아니었다. 그것은 임원 B가 저지른 모든 범죄 행위들이 적나라하게 기록된 고발장이었다. 법인카드 사용 내역, 내연녀와 함께 보낸 날들, 해외에서 즐긴 호화로운 생활, 사치스러운 쇼핑, 값비싼 와인과 요트 투어. 그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서류 안에 적혀 있었다. 그 기록은 마치 그의 비밀스런 인생을 조목조목 들춰내는 것처럼 보였다.
“회장님,” 임원 B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떨렸지만, 그는 자신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배터리 사업이 부진한 것은 제 잘못만은 아닙니다. 글로벌하게 어려운 상황이고, 전 세계적으로 동일한 문제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오히려 적자 폭을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새로운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손해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엄모순의 차가운 시선은 그의 말을 단숨에 잘라냈다.
“최선을 다했다고? 그럼 이게 네가 말하는 최선인가? 배터리 사업은 망해가는데, 네가 법인카드로 네 여자랑 전용기 타고 다닌 것도 최선이었나? 마이애미? 파리? 아니면 모나코에서 그 전략을 구상했나?”
그의 말투는 차가웠지만 그 속에 담긴 경멸과 분노는 더 없이 선명했다. 엄모순의 눈은 마치 상대방의 영혼을 꿰뚫어보듯 깊고 차가웠다. 임원 B는 그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을 내리깔았다. 엄모순은 비웃듯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언제든 상대방의 목을 칼로 베어낼 수 있을 정도로 잔인한 것이었다.
엄모순은 분노에 찬 맷돼지 한마리가 앞발을 들고 내리치듯이 책상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그 소리는 사무실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의 분노는 이제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었다.
임원 B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분명 이런 날이 올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이 실제로 닥친 지금, 뇌가 빙하속에 얼어붙은 듯 어떠한 대응도 떠오르지 않았다. 엄모순의 눈에는 이제 임원 B를 향한 어떠한 기대도, 신뢰도 남아있지 않았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지? 내가 널 믿고 여기까지 올려줬는데, 네가 나한테 이렇게 배신을 해? 네가 네 여자와 그룹 돈으로 사치를 시작한 그때가, 네가 날 배신한 순간이야.”
엄모순의 목소리는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그의 말은 칼처럼 임원 B의 가슴에 날아와 박혔다.
임원 B는 의자에 앉은 채로 손을 덜덜 떨었다. 그는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순간,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최후의 승부수를 던지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아직 한 장의 비장의 카드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카드를 꺼내들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회장님, 저는 엄 회장님과 손혜민의 비자금도 관리해왔습니다. 그 모든 증거는 제 손에 있습니다. 만약 제가 이 자리를 잃게 된다면, 모든 자료를 언론에 흘릴 겁니다. 회장님과 손혜민의 가명으로 관리하던 비자금, 조세회피 지역 및 미국, 스위스 은행에 숨겨놓은 차명 계좌, 투자로 세탁한 다양한 비자금 그리고 그와 관련된 모든 비리들이 세상에 드러나게될겁니다. 당신도, 손혜민 씨도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임원B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마지막 대사를 내뱉는다.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숨을 쉬기가 벅찰 정도로 심장이 마구 뛰고 있었다.
“500억 퇴직금을 보장해주십시오. 그럼 저는 조용히 떠나겠습니다.”
임원 B의 목소리는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다 이루었다고 할만큼 순식간에 차분해진 임원B. 화살은 그의 손을 떠났고 비수처럼 엄모순의 머리를 겨냥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카드를 꺼내며, 그 순간 엄모순을 노려보았다.
엄모순의 눈빛이 순식간에 잿밫으로 변했다. 자신과 손혜민의 비자금 문제는 절대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 되는 일. 그것이 밝혀지는 순간, 그의 모든 것이 끝장날 수도 있었다. 엄모순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눈은 이미 증오와 분노로 번들거렸다. 그러나 그도 알고 있었다. 임원 B의 말이 현실화되면, 자신뿐만 아니라 엎친데 덮친격으로 그룹 전체가 엄청난 타격을 입을 것이고, 그 파장은 자신들의 자식들에게도 그대로 퍼질 터였다. 한 방울의 피도 용납하지 않으려던 그가 처음으로 위기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순간적으로 엄모순은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보였다. 그의 손끝이 떨리고, 그의 차가운 눈빛이 흔들렸다. 지금 그는 이혼 소송과 그로 인한 골치 아픈 문제들로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이제 그 위에 비자금 문제가 더해지면,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순간 실오라기 하나도 없이 세상에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세상이 집어삼킬 듯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손혜민은 그의 가장 큰 적이 될 것이다. 그가 그녀에게 모든 것을 내주고도 그녀는 그를 끝까지 몰아붙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모순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다시 냉혹한 눈빛을 되찾았다. 엄모순은 김탁기를 불렀다. 김탁기는 준비된 서류를 또 한 번 임원 B 앞에 내던졌다. 그 서류는 임원 B의 모든 불법 행위와 은닉한 자금에 대한 기록이었다. 그 안에는 이미 임원 B가 불법으로 가족에서 증여한 기록, 은닉한 재산들, 각종 불법적인 행위들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김탁기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검찰에 넘길 준비까지 마친 상태였다.
엄모순은 천천히 말했다. “네가 날 협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B? 넌 나를 과소평가했어. 적당한 수준에서 회사에 끼친 피해에 국한해서 무마하려고 했더니 니가 그렇게 나오니 별 수 없지. 니 수준에 맞춰줄 수 밖에. 이미 네 비밀은 모두 드러났다. 검찰에 자료를 넘기는 순간, 네 자녀들까지 모두 조사를 받게 될 거야. 네가 말하는 증거? 그건 이제 아무 소용 없어. 네가 그룹에 저지른 배신은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그리고 누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 네 협박은 끝이야, B.”
임원 B는 순식간에 자신이 벼랑 끝으로 몰려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마지막 승부수는 철저히 짓밟혔다. 그의 불법 증여 내역도 철저하게 조사될 것이며, 가족들 모두가 함께 몰락할 위기에 처했다.
엄모순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모순의 목소리는 마치 판결을 내리는 판사처럼 냉정하고 무자비했다.
“네가 여기에 서명하면, 100억을 받고 퇴진할 기회를 주겠다. 그러나 네가 끝까지 반항하면, 너와 네 자녀들은 감옥에서 생을 마감할 거야. 선택은 네 몫이야.”
임원 B의 손은 차갑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은 패자의 눈빛으로 엄모순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엄모순의 잔혹한 결정은 변하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임원 B는 자신의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였다. 그의 권력, 그의 지위, 그의 돈,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지금껏 쌓아올린 모든 성과는 그가 사인하는 그 서류 한 장에 의해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서류에 서명하는 순간, 그는 자신이 철저히 패배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엄모순은 서명을 확인하더니, 미소를 짓는 대신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를 접어 책상 위에 던졌다. 이제 임원 B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더 이상 협박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 모든 카드는 엄모순의 손에 넘어갔고, 그 자신은 그저 쫓겨날 준비를 해야 했다.
엄모순은 냉정하게 말했다.
“이제 네가 할 일은 한 가지다. 조용히 꺼지는 것. 너와 네 가족은 이제 우리 그룹과 더 이상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리고 네가 이 문제에 조금이라도 개입하려 들면, 그때는 네가 감옥에서 썩어 문드러지게 만들어 줄 테니 그 점을 명심해라.”
임원 B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눈에는 패배감이 가득했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 순간,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더 이상 그룹의 부회장이 아니었으며, 그가 쌓아온 모든 권력과 명예는 이제 먼지처럼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비참한 퇴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편 우리 부장 A는 오늘도 일분 일초가 아까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매일 반복되는 회의와 보고서, 임원들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평범한 부장처럼 보이지만, 그는 그 이면에 숨어 있는 복잡한 계획들을 하나씩 준비하고 있었다. AB그룹은 단순히 몇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진짜 목표는 오랜 세월 동안 감춰온 것이다. 그는 수십 년을 인내하며 버텼다. 내부의 권력 다툼을 멀리서 지켜보며, 진짜 카드는 언제 꺼내야 할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제 때가 왔다. 더 이상 뒤로 물러날 필요가 없었다.
부장 A는 한밤중에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를 타고 은밀히 이동하는 그의 목적지는 한적한 카페였다.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바로 김준호였다. 과거 AB그룹의 실질적 브레인으로 불리던 김준호는 엄모순과의 갈등으로 인해 은퇴했지만, 그 은퇴는 계획된 것이었다. 김준호는 여전히 그룹 내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그의 사람들은 여전히 그룹 곳곳에 포진해 있었다. 김준호는 단지 뒤로 물러난 것일 뿐, 언제든 다시 무대로 돌아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준비는 잘 되고 있습니까?” 부장 A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김준호는 차분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거의 준비는 완료됐다. 이제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타이밍을 절묘하게 맞추는 일이다. 외부 자본이 우리의 계획에 따라 움직일 준비가 됐고, 정부도 이미 등을 돌린 상태다.”
부장 A는 긴장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여야겠군요.”
김준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손으로는 차잔을 들고 차를 모금 마셨다. “엄모순은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허점은 이미 드러나기 시작했어. 배터리 사업이 실패로 돌아간 건 단순한 실수로 끝날 문제가 아니지. 이제 그를 무너뜨릴 기회는 충분해.”
부장 A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엄모순이 여전히 강력한 권력을 유지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상황이었다. 그룹 내부에서는 임원 B가 몰락하는 것을 보면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고, 이사회 역시 배터리 사업의 실패 이후 엄모순에 대한 신뢰를 잃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외부 자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외부 자본이 우리 쪽으로 완전히 돌아선 것이 확실한가요?” 부장 A는 다시 물었다.
김준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확실하다. 그들은 지금 엄모순을 믿지 않는다. 배터리 사업 실패로 인해 주가가 곤두박질치고 있고, 그로 인해 그들이 잃은 돈이 막대하다. 이 상황에서 그들은 더 이상 엄모순에게 의존하지 않고, 우리가 제시하는 새로운 에너지 사업 모델을 원하고 있어. 우리는 이들을 통해 엄모순의 목을 조일 수 있다.” 김준호는 뜨거운 찻잔을 부실 듯이 손에 움켜쥐고 미간을 찌푸린다.
부장 A는 차갑게 미소 지었다. 이제 상황은 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부장 A와 김준호는 단지 외부 자본만을 등에 업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정부와도 은밀히 손을 잡았다. 김준호는 AB그룹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여전히 도처에 강력한 인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가 구축한 네트워크는 재계뿐만 아니라 정치권까지 뻗어 있었고, 그 덕분에 그들은 AB그룹을 재편하는 데 필요한 모든 자원을 동원할 수 있었다.
“정부의 움직임도 중요해,” 김준호가 말을 이었다. “그들은 지금 재생 에너지 사업에 큰 관심을 갖고 있어. 우리가 제시한 새로운 사업 모델은 국가 차원에서 중요한 프로젝트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 정부와 손을 잡으면, 엄모순은 더 이상 우리를 막을 수 없을 거야.”
부장 A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지금 엄 회장은 정부와의 관계도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그가 과거에 쌓아온 인맥들이 점점 멀어지고 있고, 배터리 사업의 실패로 인해 정부도 그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고 있죠. 이제 우리가 나설 차례입니다.”
김준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가 제시할 재생 에너지 사업은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밖에 없어. 그들은 배터리 사업 실패로 인해 경제적 충격을 최소화하려고 하고 있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 우리가 제시하는 사업을 밀어줄 거야.”
부장 A는 김준호의 계획이 완벽하다고 느꼈다. 외부 자본과 정치적 지원이 뒷받침되는 상황에서, 엄모순은 더 이상 자신을 지킬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그룹 내부의 주요 임원들과 접촉하며, 자신들의 계획을 설명하고 지지를 얻고 있었다.
부장 A와 김준호는 먼저 임원 C와 임원 D에게 접근했다. 이들은 이미 엄모순의 독단적 경영에 지쳐 있었고, 임원 B의 몰락을 보며 자신들도 언제든지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배터리 사업 실패 이후, 그룹이 어디로 갈지 불투명합니다.” 부장 A는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엄 회장은 더 이상 그룹을 이끌어갈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사업을 제시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김준호 선생님과 제가 마련한 재생 에너지 사업 모델은 이미 외부 자본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이사회에서 엄 회장을 몰아내면, 우리는 그룹을 다시 일으킬 수 있습니다.”
임원 C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더 이상 엄 회장을 믿을 수 없어. 배터리 사업이 망가진 것도 그렇고, 임원 B가 몰락한 것을 보면, 우리도 언제든지 희생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임원 D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그룹은 더욱 큰 혼란에 빠질 거야.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해. 그리고 그 리더십은 너희가 제시한 방향으로 가야 해.”
부장 A는 그들의 반응에 만족했다.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내부에서의 지지였다. 내부 임원들의 지지가 있으면, 외부 자본과 정치권을 등에 업고 엄모순을 몰아내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호텔 사우나에서 한참을 머문 임원B. 온몸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벌겋에 달아오르는 것을 눈치채지도 못하고 거울을 보는 순간 흠칫 놀란 임원B. 탕속에서 데워진 온몸이 퉁퉁 불어 올라 마치 펭귄 같은 자신의 몸을 무심히 쳐다본다. 탕속에서 사우나 안에서 정신을 차리고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써먹을 것이라 다짐했던 여러 패를 곰곰이 다시 되새기고 있었다. 그도 나름 치밀하게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것에 대비한 계획이 있었던 것이었다. 이미 엄모순, 손혜민 두 사람 사이를 수없이 왔다 갔다 하면서 그룹내에서 유일하게 두 사람의 언어를 모두 구사하고 통신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부회장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데다 ‘엄모순어’, ‘손혜민어’를 다양하게 적재적소와 타이밍에 구사하고 그들의 눈빛, 손짓, 발짓 모두 즉시 파악하여 대응하는 실로 눈치백단의 인물이었다.
순간 손혜민을 떠올리며 손혜민에게 든 보험을 이번에 써먹어야겠다고 판단한 임원B.
그날 밤, 임원 B는 자신의 과천 아파트에서 손혜민에게 마지막 전화 한 통을 걸었다.
“손혜민 여사님,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엄모순 회장이 저를 내치려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도 큰 위기가 닥칠 겁니다.”
그러나 손혜민은 그를 차갑게 단칼에 무시했다. 그녀는 이미 자신이 새로운 전략을 마련했다고 믿고 있었고, 엄모순의 내연녀, 오민형과 관련된 자금을 관리해 오던 B가 더 이상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난, 남이 씹다 버린 껌은 다시 씹지 않아, B. 내가 널 다시 믿을 거라고 생각한 거냐?”
임원 B는 이 한 마디로 자신이 든 보험의 보험금 청구가 쉽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그러나 쥐도 밝으면 꿈틀거리는 법.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고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쉬울 것도 없고, 묘한 용기가 슬슬 끓어올랐다. 절망에게 조그만 틈이라도 보이면 순간 독버섯처럼 올라오는 법. 오히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자료를 이용해 손혜민을 협박하기로 결심했다.
“제가 여사님과 엄모순 회장의 비자금을 관리해왔다는 걸 여사님도 알고 계실 겁니다. 모든 자료는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제게 협조하지 않으면, 여사님의 비리 또한 언론에 폭로될 겁니다.”
손혜민의 얼굴은 당혹스러움으로 일그러졌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비밀이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을 직감했고,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그녀도 그와 손을 잡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이를 어쩐다….” 손혜민의 날카로운 눈이 독사처럼 번쩍이고 있었다……
한편 임원 B는 사무실 책상 위에 쌓인 보고서를 무심히 훑어보다가 울리는 전화 벨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화면에 떠오른 발신자 이름을 확인한 순간, 미간이 좁혀졌다. 사모펀드 업계에서 오래전에 알게 된 동생이였다. 말이 동생이지 AB그룹에 어떻게든 연줄을 대고 빨대를 꽃으려는 또다른 기회주의자였다. 한참을 전화가 울리는 걸 방치하다 기분도 그렇고 오랫만에 사모펀드 업계 얘기도 들을겸 술생각도 간절해 마지못해 전화를 받았다.
“형, 중요한 얘기가 있어. 김준호 알지? 그 인간이 임원 C, D랑 같이 움직이고 있어. AB화학하고 AB가스 합병을 막으려고 뭔가 꾸미고 있는 것 같아.”
사모펀드 업계 동생의 말에 임원 B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AB화학과 AB가스의 합병은 엄모순 회장이 밀어붙이고 있는 프로젝트였다. 엄 회장은 언제나 자기 마음대로였고, 그로 인해 임원 B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적잖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김준호가 합병을 막으려 한다? 그건 엄 회장에게 치명타를 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통화가 끝난 후, 임원 B는 잠시 멍하니 앉아 생각에 잠겼다. 이번 일을 잘만 이용하면 숙주 엄 회장을 한번에 무너뜨릴 수도 있을 터였다. 그는 속으로 흐릿한 웃음을 지으며 서랍을 열고 김준호의 연락처를 찾기 시작했다.
오래전, 김준호와의 연이 끊어진 이후로는 별다른 접촉이 없었지만, 그에게 이 제안을 한다면 손을 잡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김준호 역시 자신만의 이익을 취할 기회를 노리고 있을 테니.
마침내 김준호의 번호를 찾아내자, 그는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울리더니, 상대방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십니까?”
“오랜만이야, 김준호. 나 임원 B야. 할 얘기가 있어. 네가 좋아할 만한 제안이야.”
임원 B의 목소리엔 차가운 독기가 서려 있었다. 전화선을 타고 그 독이 서서히 김준호에게 스며드는 순간이었다.
김준호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임원 B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의 의도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몇 주 전, AB경제연구소에서 오랫동안 알고 지낸 지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임원 B가 엄모순 회장과 최근에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임원 B가 회사 내에서 적잖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회장과의 불화로 인해 그의 입지가 불안정하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정보는 김준호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그는 이미 부장 A와 몇 번 술자리를 함께하며 이 갈등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지 논의한 적이 있었다. AB화학과 AB가스의 합병은 회장의 야심이 담긴 프로젝트였지만, 동시에 회사 내부에 많은 불만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임원 B가 회장의 반대편에 서 있다면, 자신에게 유리한 카드로 쓸 수 있을 터였다.
술잔을 기울이며 부장 A와 나눈 대화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형님, 회장과 임원 B가 싸운다는 얘기가 있던데, 우리가 이 갈등을 잘 이용하면 뭔가 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김준호는 천천히 잔을 내려놓으며 부장 A의 제안을 음미하듯 받아들였다. "그렇지. 기회가 될 수도 있겠군."
그 순간이 바로 지금이라고 느꼈다. 임원 B가 이렇게 먼저 전화를 걸어온 건, 분명 자신의 손을 잡으려는 신호였다. 김준호는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임원 B의 말을 끊지 않고 듣기 시작했다. 이 전화를 계기로, 그들이 함께 엄 회장을 무너뜨릴 수 있을지, 혹은 더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을지는 치밀한 전략과 강력한 실행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김준호는 이미 머릿속에서 이 모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