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전철역 입구에 선다.
출발점도 아닌, 끝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가 보인다.
회색 외투의 끝자락이 바람에 일렁이며,
아버지의 걸음이 계단을 하나씩 내려가고 있다.
나는 그곳에 서서
아버지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그때는 그게 마지막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하숙집으로 향하는 전철 안,
삶의 새로운 출발지에 섰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혼자였음을,
고향의 따스한 기억들을 뒤로하고
차가운 도시로 떠나는
어린 나를 아버지는 그저 묵묵히 뒤돌아섰다.
그 순간 아버지의 마음을 나는 알 수 없었다.
할머니는 늘 그랬다.
내가 돌아갈 때면
버선발로 마당 끝까지 나와
골목길 끝까지 따라오며 손을 흔들었지만,
아버지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그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멀어지는 뒷모습,
떠나지 않으려는 마음을 애써 숨긴 채
그 자리에 서 있던 아버지.
어두운 전철 창 너머로
불빛이 지나가고,
서울의 높은 빌딩숲 사이에서
고향의 익숙한 풍경이 아른거렸다.
아버지의 목소리,
단 한 번도 크지 않았던 그 음성이
내 가슴 속에서
잔잔한 물결처럼 퍼져 나갔다.
그리운 것은 아버지보다
늘 할머니였다.
할머니의 주름진 손,
날 위해 손수 만들어 주신 뜨거운 소고기 국 한 그릇.
그러나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언제나 묵묵히 나를 보내주었고,
그 보내는 순간조차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려 했던 그 사람.
차가운 별빛이 얼음 꽃처럼 깔린 밤,
아버지가 떠올랐다.
멀리서도 항상 지켜보았던 그 눈길,
회색 외투 끝자락이 바람에 흩날리며
작은 점이 되어 사라져 갔던 그날.
그날의 전철역에 다시 섰다.
아버지가 사라지던 계단을 걷는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서울의 낯선 거리 위에서 애써 등을 돌려야 했던
아버지의 그 마음을.
문득 그때의 어린 내가 홀로 서울의 낯선 거리 위에 섰다.
두려움에 떨던 작은 어깨를 감싸 안고, 괜찮다고 속삭인다.
아버지의 그 쓸쓸한 뒷모습도,
아버지라는 어색하고 서툰 그 여린 마음도,
꼭 안아준다.
이제 나도 그때의 아버지 나이를 먹었다.
그날의 아버지처럼
나도 아이를 보내야 할 날이 올 것이다.
계단 위에 서서
멀어져 가는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사랑을 숨기고 돌아서야 할 그날이 오면
나는 그때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까.
아버지의 뒷모습이
빈 들판에 남은 서리처럼,
내 마음 한구석에 절절하게 남아
깃발처럼 흩날린다.
한 번도 버선발로 달려 나오지 않았던 그 사랑이,
얼어붙은 눈처럼 소리 없이 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