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인동에 살던 한 명의 가수와
효자동에서 태어난 강아지 한 마리
홍성민의 '기억날 그날이 와도'에는 효자동의 이미지가 깃들어 있습니다. 효자동이라고 대표했지만 사실 '서촌'의 이미지입니다. 최근에는 사람들이 찾는 모양이지만 제가 한국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보통 '북촌' 한옥 골목과 '삼청동' 까페 골목은 유명세를 타고 있었던 반면에, 서촌이라 불리는 효자동, 통의동, 창성동, 필운동 그리고 그 옆 언덕배기의 옥인동, 누상/하동 일대는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경복궁역 2번이나 3번 출구에서부터 자하문에 이르는 길을 따라 왼편으로 통인시장과 유명한 삼계탕집, 그 위로 인왕산 자락에 걸친 다닥다닥한 동네와 길 오른편으로 경복궁과 담장을 맞댄 효자동, 그리고 그 길 끝에 인왕산과 윤동주, 자하문 너머 부암동, 세검정에 이르기까지 사실 취향에 따라 끌리는 내용도 방법도 다양한 동네입니다.
서촌 일대는 제가 결혼하고 신혼집을 알아보기 위해 처음으로 들렀던 동네이기도 하고, 아이들이 커가면서 청운동 복덕방에도 몇 번 찾아다녀 보았던, 한 번쯤 살아보려고 했던 동네 중에 하나였습니다. 생활 편의 시설이나 주거 환경 등 여러모로 열악한 환경임에는 분명하지만 아련한 기억처럼 골목이 남아있고, 넉넉한 야경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장모님이 교동 국민학교 출신이신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동네를 생각할 때마다 옥인동에 살던 한 명의 가수와 효자동에서 태어난 강아지 한 마리가 떠오릅니다.
옥인동에서 바라본 야경
효자동에서 온 강아지
추억이란 놈은 기억 한켠에 담아 두지만
꺼내놓으면 언제나 가슴 한켠이 메어지는 것 같습니다.
오래전, 효자동에서 태어난 강아지를 키운 적이 있습니다. 스물아홉이나 서른 살 언저리쯤의 일인 것 같습니다. 생일날이었을 겁니다, 당시 제가 다니던 회사엔 입사 동기인 퀸카 디자이너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제 생일이라는 걸 알고는 얘기를 꺼냈습니다.
"이 윤발(가명. 29세) 씨, 생일이라며?"
' (속으로) 그런데 왜?'
"내가 선물해 줄까? 뭐 필요한 거 없어?"
"개, 새끼"
그냥 해보는 소리라고 생각한 저는 '설마'라고 생각하며, 주저 없이 강아지라고 얘기했습니다. 늦도록 시집 장가를 안 가고 있는 아들딸 때문에 손주 대신 강아지나 한 마리 키워야겠다는 어머니 말씀이 떠올랐던 겁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사무실에서 야근하고 있던 저에게 그녀는 강아지 한 마리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그녀의 큰집이 효자동에 있었는데 마침 십수 년을 키운 어미 개가 새끼를 여럿 낳았다는 것이었습니다. 퇴근 후에 회사가 있던 마포에서 효자동까지 가서 똥강아지 한 마리를 얻어 온 것인데 여기에는 몇 가지 의문점이 남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6시 칼퇴근녀였다는 사실입니다. 광고대행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해서는 야근조차 하지 않는 그녀가 기대하지도 않았던 강아지 하나 때문에 그 시간에 회사로 다시 돌아오는 일이 벌어졌던 겁니다. 그것도 SBS PD라는 직업을 가진 남자와 결혼을 전제로 사귀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지요.
어쨌거나 강아지의 이름을 '난이'라고 지어 주었습니다. 똥개였기 때문인데 정식 성과 명은 '맛난이'입니다. 지금도 생각나는 게 그날 밤, 차를 몰고 집에 가는 길에 하도 낑낑거려서 충정로 종근당 앞 고가도로 밑에 세워놓고 도로 한복판에서 오줌을 뉘기도 했답니다.
암튼 워낙 먹성이 좋고 하루가 다르게 몸집이 불어나는데 처음에 데려갈 때는 주먹 만했던 놈이 열흘쯤 지나고 나서는 정말로 곰 만해졌습니다. 결정적으로 길들여지지 않은 똥개라 똥오줌은 가릴 생각조차 없고, 조그마한 아파트에서 시도 때도 없이 뛰고 싸고 짖어대는데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기분 좋을 땐 아무 데나 마구 물어대는데 자기는 좋아서 놀겠다는 표현이지만, 물리는 사람은 이빨 자국이 패일 정도로 아팠습니다.
결국 손주 대신 강아지라도 키워보시겠다던 어머니마저 포기하시고, 다른 집으로 분양하기에 이르렀는데 사연 인즉은 이렇습니다. 어느 날 제가 난이를 안고 마트엘 갔는데 아르바이트하던 아가씨가 너무 이뻐하길래 물었습니다.
"근처 아파트에 사세요?"
"아니요. 전철역 나가는 쪽 주택가에 살아요. 그런데 왜요?"
"잘 됐네요. 이 놈 이름이 난이인데, 혹시 키워 보실 수 있겠어요? 강아지 무척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요."
"그럼요.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저희도 매년 강아지를 키워요. 근데 올해는 아직 없어요."
"부모님도 괜찮으시겠죠?"
"아마 저희 아버지는 똥개라서 좋아하실 거예요."
그렇게 불쑥 난이를 넘기고 돌아오는 길에 덜컥 이상한 한기가 엄습했습니다. '매. 년. 똥개를 키운다고? 매년 키우는데, 똥개라서 좋다고?' 일단? 의구심이 생기자 생각은 깊어만 갔습니다. 그렇다고 난이를 다시 데리고 오기도, 데리고 있을 방법도 없었습니다.
"에이, 설마"
어쨌거나 효자동에서 강아지를 가져다준 그녀는 아이엠에프 당시 회사를 그만두었고, 이후 한동안 소식도 모르고 지내다가 우연히 프리챌이라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쪽지로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만나서 '번지 점프를 하다'라는 이상한 영화를 보고 헤어졌는데, 지금은 지원이, 승원이의 엄마가 되어 있습니다.
효자동에서 달려온 강아지는 그저 똥개 한 마리였을지 모르지만, 그놈이 늦깎이 남녀의 사랑과 하나의 가정과 그 가족의 삶을 함께 가지고 온 복덩어리였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것입니다.
집사람 말에 의하면 효자동 큰집 툇마루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의 야경은 나름 운치 있었다고 하는 데, 저는 부암동 북악 스카이웨이 방향에서 바라본 서울의 야경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 효자동에 사시던 큰 아버님은 수년 전 돌아가시면서 이제 그 풍경을 눈에 담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먼 타국 땅에서 살고 있는 지금, 다시금 서촌에 올라 서울의 야경을 바라볼 수 있을는지 조차 모르겠습니다.
옥인동 수성 계곡 부근에서 바라본 서울 야경 註) 집사람의 큰집은 효자동이 아니라 옥인동으로 추정됩니다. 툇마루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의 야경이 효자동에서 나올 수 있는 그림은 아닌 것 같기 때문입니다.
기억날 그날이 와도
나를 사랑했어도 이젠 다른 삶인걸
가리워진 곳의 슬픔뿐인걸
서촌의 여러 동네 중에서 옥인동은 성민이 형이 살던 동네입니다. 이오공감의 오태호와 함께 공중전화로 데뷔한 후, 솔로로 활동하면서 '기억날 그날이 와도' 딱 한 곡의 히트곡을 남긴 가수 故 홍성민.
-홍성민 노래, 오태호 작사/작곡
변치 않는 사랑이라 서로 얘기하진 않았어도
너무나 정들었던 지난날
많지 않은 바램들의 벅찬 행복은 없었어도
이별은 아니었잖아
본 적 없는 사람들에 둘러싸인 네 모습처럼
날 수없는 새가 된다면
네가 남긴 그 많았던 날 내 사랑
그대 조용히 떠나
기억날 그날이 와도 그땐 사랑이 아냐
스치우는 바람결에 느낀 후회뿐이지
나를 사랑했어도 이젠 다른 삶인걸
가리워진 곳의 슬픔뿐인걸
본 적 없는 사람들에 둘러싸인 네 모습처럼
날 수없는 새가 된다면
네가 남긴 그 많았던 날 내 사랑
그대 조용히 떠나
기억날 그날이 와도 그땐 사랑이 아냐
스치우는 바람결에 느낀 후회뿐이지
나를 사랑했어도 이젠 다른 삶인걸
가리워진 곳의 슬픔뿐인걸
성민이 형을 처음 만난 것은 신촌의 '라이브'라는 카페에서였습니다. 홀 한가운데 라운드 테이블을 두르고 그 안에서 라이브 연주를 하던 곳이었는데, 이은미, 김광석, 강산에 등도 거쳐(?) 갔던,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명소였습니다. 저는 주로 심야에 들렀고, (새벽 1시 30분까지 영업을 했습니다.) 당연히 거나하게 취해서 들를 때가 많았습니다.
그게 언제였는지는 정확지 않지만 아마도 90년대 초중반쯤이었을 겁니다. 노래하는 가수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캔맥주(버드)를 마시고 있었고, 무대에서는 누군가가 홍성민의 '기억날 그날이 와도'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술김에 큰 소리로 떠든 건 역시나 저였습니다. " 에이~ XX, 좋은 노래 망치고 있는 게 누구야? 홍성민이 들으면 울겠다" 뭐 이런 정도의 고함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물론 저는 홍 성민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때 옆에 있던 친구가 내 머리를 쥐어 감싸며 한 소리 했습니다.
"저 사람이 홍. 성. 민이야"
연대 정문 앞 Live
이후로 성민이 형을 다시 만난 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97년쯤이었습니다. 성민이 형은 홍대 산울림 소극장 건너편에서 CO/DA라는 까페를 인수하여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술도 팔아주고 술김에 악기들도 건드려 보고 하는 재미로 종종 CO/DA에 들렀습니다. 때론 까페를 통째로 빌려 생일파티를 열고, 잼 놀이를 하기도 했었지요. 이때 성민이 형은 휴머네이드라는 팀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홍대 산울림 소극장 건너편 CO/DA
그러던 중 작은별 가족의 (강) 인구 형과 일로 잠시 압구정 쪽으로 진출해 있다가, 새로운 직장을 잡아 서소문으로 돌아오면서 다시 자주 들른 곳은 신촌의 '스펠바운드'라는 까페였습니다. 스펠바운드는 비풀과 라이브, SUS4 등에서 만나 친분이 있었던 (문) 성일이 형이 운영하던 라이브 까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성민이 형을 만나게 됩니다. 전설의 기타리스트라 불리는 (이)중산이 형에게 보증 서준 게 있어서 대출을 받을 수 없다면서 제게 급전을 요청했습니다. 원래 불알친구에게도 돈을 빌려주지 않는 저였지만 술김에 얼떨결에 약속을 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저의 경제력에도 한계가 있어서 전부는 해주지 못하고 아하론패스란 걸 이용해서 일부를 성민이 형에게 건넸습니다. 쉽게 말해서 제 명의로 대출받아서 빌려 준 겁니다. 이때 법적 효력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형식상 등본과 서약서 한 장을 받아 놓으면서 성민이 형이 옥인동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몇 개월이 지나고 나서부터 성민이 형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한때 서소문 삼성본관 뒤쪽에서 라이브 까페 '포크송'을 운영하던 창성이도 만나게 해 주겠다고 나섰지만, 전 그럴 필요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제가 돈이 많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 돈 때문에 결혼 전선에 문제가 있을 뻔할 정도로 제게는 만져 볼 수 없는 큰돈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성민이 형을 찾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형은 많이 외로워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부단히 이겨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고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더러는 흐트러진 웃음이나마 치고받으며 지난 일로 얘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제가 연락을 하면 돈 얘기가 될 테고 그건 서로가 불편한 일이 될터였기 때문입니다. 그저 형이 살던 옥인동을 지날 때마다, 홍대 앞, 신촌을 지날 때마다 언젠가 자연스럽게 만날 텐데 하며 생각만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성민이 형이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부고를 언론을 통해 접하게 되었습니다. 빈소가 있었던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엔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왜 가?" "그러게 내가 왜 가지?" 이게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람을 깊게 많이 사귀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아무튼 형과는 서로가 속한 상황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또 각자 걸어가는 길도 달랐습니다. 다만, 그렇고 그런 일련의 사연들로 하여금 서로를 알게 되었고, 음악을 통해 가까워지고 그 속에서 음악을 사랑하고 고뇌하던 좋은 사람 하나를 떠나보내게 되었다는 개인적인 안타까움을 기억할 뿐입니다. 다만, 이렇게 가끔은 형을 추억하는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저 세상에서라도 한 마디의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라볼 뿐입니다. 전혀 가수라는 허세도 꾸밈도 없이 사람 좋은 웃음 짓던 형을 추억하며, 다시금 형의 명복을 빌어 봅니다.
그렇게 효자동에서 둘을 보냈습니다.
음악은 이미지다. 음악은 단순히 소리 뿐만 아니라 공감각적 형태의 소스로 저장되었다가 재생될 때 다시 그 공감각적 형태로 기억을 소환한다. 우리는 이름하여 그것을 추억이라 부르고, 나에게 추억은 음악을 틀면 활성화되는 이미지 파일들로 저장되어 있다. '그 남자의 음악다방'에서는 음악에 얽힌 지극히 개인적이고 소소한 추억의 이미지를 통해 소시민적 삶의 단면을 담아보려 한다.